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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 동영상으로 교통사고 순간 재연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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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08면

기자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유전자 감식과를 찾았을 때 한 감식관이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증거품을 분석하고 있었다. 8월 초 실종됐다가 변사체로 발견된 제주도 유치원 여교사 사건의 현장 증거물들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치아, 여성 속옷, 토사물, 혈흔이 묻은 것으로 보이는 돌멩이가 검사 대상이다.

첨단수사의 '메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치아 감식 결과 피해자의 것으로 확인됐다. 심하게 맞아 치아가 빠진 것으로 추정됐다. 또 속옷에서 정액이 검출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액검출 시약을 투여했다. 암실 상태에서 이 시약을 투여하고 특수 광선에 쪼이면, 정액이 있을 경우 보라색을 띠게 된다. 속옷에서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현장에서 가져온 돌을 분석했다. 루미놀 시약을 투여하자 푸른 형광색을 띠었다. 돌에 사람의 혈흔이 묻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 혈흔이 피해자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인지를 확인해야 했으나 DNA 검출에는 실패했다. 국과수는 이 분석 결과를 경찰에 통보했다.

며칠 뒤 사건은 다소 엉뚱하게 풀렸다. 여교사의 이웃에 살던 30대 양모씨가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한 것. 양씨는 사체가 발견되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충동적으로 자살을 선택했다. 경찰은 양씨 집을 수색해 그의 자동차 시트에 묻어 있는 혈흔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혈흔을 국과수에 보내 유전자 감식을 벌인 결과 여교사의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과학수사 기법 중 가장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 유전자 감식은 1991년 국과수에 유전자분석실 설치 이후 16여 년 동안 기술 발전을 거듭했다. 국과수는 DNA 유전자 감식과 마약 분야에서는 세계 표준화기구 규격 인증을 받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서래마을 영아 피살 사건 때 국과수는 영아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밝혀내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 발 더 나아가 국민 실생활과 관련이 깊은 교통사고 감식을 통해서도 사건 해결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국과수 교통공학과가 최근 도입한 ‘마디모(Madymo)’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마디모는 차량 탑승자의 안전도와 인체손상 원인, 사고 당시 상황 등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3차원 동영상으로 구현해 준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 사고에서 가장 큰 쟁점은 보행자가 횡단보도상에서 사고를 당했는지 여부다.

이때 사고자의 상처 위치와 정도, 차량 충돌부위의 형상 등 세부 자료를 마디모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사고자가 최초 충돌지점에서 얼마나 멀리 이동했는지를 정확히 계산해 3차원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또 추돌 사고로 인해 차량 탑승자가 외부로 튕겨져 나갔을 경우 충격의 강도와 탑승자의 이탈 위치·방향 등 세부적인 요소를 프로그램에 입력해 운전자가 누구였는지를 정확히 판별해낼 수 있다.

손성건 교통공학과장은 “최근 교통사고에 따른 보험금 지급 문제 등으로 법적 소송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려내고 사고 순간을 재연해냄으로써 정확한 판단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기술을 새로운 분야에 적극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과학수사의 진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국과수에 들어오는 감정 의뢰 건수는 해마다 증가해 2000년 감정 건수 10만 건을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22만여 건에 달했다. 이에 비해 국과수의 규모는 턱없이 작다. 지방 분소까지 다 합해 260여 명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분석을 맡고 있다. 위상에 걸맞은 예산·인력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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