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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사람 바꾸고, 현장 독려하고 … LG그룹 뼈 깎는 1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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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18면

9일 LG그룹 여의도 본사. 구본무 회장과 계열사 임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세미나가 열렸다. 구 회장의 얼굴에선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LG CNS의 고현진 부사장이 ‘웹2.0시대’를 주제로 강연에 나서면서 이날 행사 분위기는 더 훈훈해졌다. 활달한 성격의 고 부사장이 농담을 섞어가며 강연을 진행하자 좌중에선 폭소가 터졌다. 구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한 참석자는 “회장이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여러 차례 파안대소했다”고 전했다.

구본무 회장 마침내 껄껄 웃었다

구 회장의 ‘파안대소’는 확 달라진 LG그룹의 분위기를 상징한다. 같은 날 LG필립스LCD(LPL)가 3조9530억원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분기 매출을 발표했다. 영업이익도 6930억원으로 전 분기의 3배를 넘어섰다. LPL뿐 아니라 LG전자·화학 등 주력 계열사들도 좋은 성적이 예상된다. 이날 구 회장은 참석한 임원들에게 “어려움이 많았지만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한 덕에 연초 계획했던 일들이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며 흐뭇해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LPL은 지난해 8800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파주 LCD단지에 거액을 투자한 상태에서 패널 가격이 추락하자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모회사인 LG전자마저 휘청거렸다. 주력업체인 전자 계열사의 실적 부진은 그룹 전체의 분위기까지 침체시켰다. 삼성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고 한 수 아래라고 봤던 후위 그룹들은 덩치를 키우며 치고 올라왔다. 재계 판도에서도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업계에선 ‘LG에는 캐시 카우(돈벌이 업체)가 없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횡행했다.

하지만 지금은 ‘1년 사이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LG를 이렇게 바꿔놨을까.
당장은 LCD와 석유화학 등 주력사업의 경기가 좋아진 게 눈에 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시장에선 ‘사람’에 주목하고 있다. 삼성증권 송준덕 연구원은 “위기 국면에서 시도한 최고경영자(CEO) 교체가 잇따라 적중했고, 사람이 바뀌니 모든 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읍참마속

지난해 말 LG 트윈타워는 일순 긴장감에 휩싸였다. LG전자와 LG필립스LCD의 최고경영자를 동시에 교체하는 파격 인사가 단행됐기 때문이다. 김쌍수·구본준 부회장이 물러나고 대신 남용·권영수 체제가 들어섰다. 실적 부진 탓에 경영진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예상은 나왔지만 두 사람이 한꺼번에 물러날 것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화’로 상징되는 그룹의 문화를 염두에 둔 탓이었다. 특히 구 회장의 친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의 퇴진은 큰 충격파를 던졌다. 그 속에는 ‘실적이 나쁘면 오너 일가도 무사할 수 없다’는 그룹 최상층부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구 회장 본인부터 변했다. 그는 올 1월 중순 계열사 CEO들을 이천 LG인화원으로 불러
모았다. 매년 8월 열리던 ‘글로벌 최고경영자 전략회의’를 이례적으로 연초로 앞당긴 것이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성과’를 몇 번씩 강조했다. 그는 “각 사별로 고객가치 창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철저한 실행방안을 마련하라”며 “그 성과에 대해서는 철저히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 회장의 다짐은 엄포에 그치지 않았다. 공장과 연구소 등 현장 방문을 늘리고 계열사 CEO는 물론 개별 사업본부장들까지 불러들여 릴레이 ‘심층면담’을 벌였다. 계열사 경영은 주로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놓던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와 단절

구 회장의 의중은 교체 투입된 CEO의 성향과 행보를 통해 뚜렷이 나타났다. 권영수 사장은 LG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답게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 했다.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도 “임원급만 해도 2, 3, 4월에 한 명씩 줄였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LG의 한 관계자는 “전임 구 부회장은 마음이 여린 편이라 사람을 쉽게 자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권 사장의 사내 별칭은 ‘칼’이다. 그와 함께 일해본 한 직원은 “임원은 물론 부장·차장에게도 수시로 질문을 던지고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 그야말로 혼쭐이 났다”며 “속된 말로 한번 찍히면 끝”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고3 수험생처럼 마음을 다잡았다”고 할 정도니 사내에 ‘온정주의’가 발붙일 곳은 없었다. 마른 수건도 짜내는 고통스러운 비용절감 노력도 뒤따랐다. 투자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는 대신 기존 설비의 활용률을 높이는 등 철저히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했다. 그 결과 LPL은 2분기 12%의 비용을 줄이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3분기에도 다시 7% 이상을 절감했다.

남용 부회장은 ‘현장형’ CEO인 김쌍수 부회장과 비교해 흔히 ‘전략통’으로 불린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비서를 거쳐 주로 그룹의 미래전략과 글로벌 사업을 챙겨왔다. 그는 취임 이후 LG전자의 ‘체질개선’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LG전자는 가전 부문은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지만, 휴대전화 등 수익성 높은 상품들은 세계시장에서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남 부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본사 인력의 40%를 현장에 배치하며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글로벌 기업 출신의 외부 인재 수혈을 늘렸다.

지난 7월 LG전자는 한국 피자헛의 마케팅 담당 이사 출신의 이관섭(38)씨를 TV사업의 브랜드 마케팅 팀장으로 영입했다. ‘피자 팔던 30대 임원’에 이어 ‘수입차를 팔던 여성 임원’이 다시 마케팅 팀에 합류했다. 메르세데스 벤츠코리아 출신의 김예정(43) 상무가 그 주인공이다. 앞서 3월 남 부회장은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인 박민석(38)·최명화(42)씨를 각각 최고전략책임자(부사장), 인사이트 마케팅 팀장(상무)에 앉히기도 했다.

사내에서 경계심이 없을 리 없었다.

“직장에 20여 년을 바쳐 가까스로 임원 한번 해보나 했더니 새파란 친구들이 들어와 맞먹으려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이들 낯선 젊은 임원들이 ‘실적’을 내면서 이런 분위기도 점차 바뀌고 있다. 이미 2년 전 영입한 마창민(39) MC사업본부 상무가 대표적이다. 존슨앤존슨에서 화장품 마케팅을 담당했던 마 상무는 휴대전화에 ‘감성 마케팅’을 적용, 초콜릿폰·샤인폰·프라다폰으로 이어지는 히트폰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부 영입에 대한 남 부회장의 입장은 확고했다. 글로벌 기업 출신의 영입 인사들을 통해 ‘토종 직원’들까지 단련시킨다는 전략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앞으로는 거꾸로 LG 출신들이 스카우트의 대상이 될 정도로 전문가로 육성해야 한다는 게 남 부회장의 지론”이라고 말했다.
 
젊고, 빠르고, 소프트해져

외부 영입은 양날의 칼이었다. 실적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조직문화를 파격적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그 결과 보수적이고 다소 느리다는 평가를 받던 LG그룹은 ‘젊고, 빠르고, 소프트해지고’ 있다. 본격 적용에 앞서 ‘임상실험’을 거치기도 했다. 2005년 구 회장은 침체에 빠진 LG생활건강의 신임 사장으로 뜻밖에 외부 인사인 차석용 사장을 낙점했다. P&G, 해태제과 사장을 거친 그는 ‘창의적인 마케팅 회사’를 표방하며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부터 바꿔갔다. 그의 취임 일성은 “회사에 100%를 바치는 건 회사를 망치는 일이다. 자기 계발에 50%를 투입하라”였다. 야근은 ‘무능함의 상징’으로 정의됐다. 회의도 대폭 줄이고 사장에게 올리는 보고도 구두로 하거나 문서 한 장으로 요약하도록 했다. “그럴 시간에 다른 창의적인 일을 하라”는 주문이 뒤따랐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CEO가 결정을 빨리 내려주니 그만큼 조직에도 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선택과 집중’은 사업구조 재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수익이 나지 않는 화장품 브랜드는 과감히 단종시키고 오휘·후 등 프리미엄 브랜드에 역량을 집중했다. ‘차석용 효과’는 올 들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부임 당시 2만8000원이던 주가는 현재 17만원대로 진입했다.
 
“아직 멀었다”

최근 LG그룹의 변화는 구 회장이 설파하고 있는 ‘고객가치’라는 말로 압축된다. 올 4월 주요 계열사 사장들과 일본 도요타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그는 “우리가 도요타에서 배워야 할 것은 시스템과 제도뿐 아니라 철저한 고객중시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업계에서 도요타는 기술보다는 소비자들이 뭘 원하는가를 가장 잘 읽는 기업으로 통한다. LG그룹의 관계자는 “제조업체는 흔히 생산능력이나 기술에 집착해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며 “고객가치론은 공급자 마인드에서 고객 마인드로 시각을 바꿔야 하고 그래야 수익성도 확보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러자면 아직 멀었다”는 게 LG의 자체 평가다. 서울증권 김장환 애널리스트는 “LG그룹은 전자·화학의 비중이 절반을 넘는 경기민감형 구조”라며 “경기 사이클이 좋아지면서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년간 군살을 빼고 수익성을 제고하는 등 체질을 크게 개선했지만 시장 환경이 나빠질 경우 여전히 상황을 낙관할 수 없다. 9일 구 회장이 모처럼 크게 웃으면서도 임원들을 향해 “긴장을 늦추지 마라”고 신신당부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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