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가서는 北美, ‘데탕트 시대’ 여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호 03면

미국의 북한 핵시설 불능화 실무팀을 이끌고 있는 성 김 국무부 한국과장(왼쪽)이 11일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 에 답하고 있다. [베이징 AP=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이 본격적인 해빙 기류에 올라선 분위기다. 북한 핵시설의 연내 불능화 합의가 이뤄지면서다. 북한 외교관들이 뉴욕을 떠나 워싱턴 DC를 관광하는 모습이 목격됐고, 북한의 문화 ·학술· 체육 단체의 방미 러시가 이뤄지고 있다. 서방문화의 상징인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도 성사 직전에 있다.

교류·지원 확대로 불신 해소 노력 병행…2000년과 분위기 달라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의 방미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등 고위급 상호 방문에 머물다 수교 문턱을 넘지 못한 2000년과는 사뭇 다르다. 문화·스포츠 교류와 미국의 인도적 지원을 통한 상호 불신 해소 노력도 병행되면서 양국 간 관계정상화의 기초가 다져지는 분위기다.

북한이 연내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면 미국은 북한을 테러국가와 적성국 교역법 대상국가에서 제외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년에는 평양과 워싱턴에 상주 대표부가 설치될 수도 있다. 북·미 관계 개선은 일본의 대북정책도 유연하게 만들고 있다. 마침 온건파인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집권하면서 북·일 관계정상화 교섭도 본격화할 조짐이다.

◇봇물 이루는 민간 교류=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9월 초 제네바에서 열린 관계정상화 실무회담에서 양국 간 교류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후문이다. 그 결과가 6자회담 10·3 합의 2조 ‘관계정상화를 위한 양국 간 교류를 증대하고 신뢰를 증진시킨다’는 조항에 담겼다고 한다.

9월 8일 뉴욕 주재 북한 유엔대표부 김명길 정무공사를 비롯한 북한 외교관과 가족 10여 명은 코리아 소사이어티 초청으로 워싱턴 나들이에 나섰다. 북한 외교관의 행동반경은 뉴욕 맨해튼의 반경 30마일(48㎞)에 국한된다. 이곳을 벗어날 때는 국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수교국이기 때문이다. 북한 외교관들이 가족단위로 워싱턴 관광을 신청한 것도, 국무부가 이를 허가한 것도 양국 화해 기류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뉴욕필의 평양 공연도 힐 차관보가 적극 나선 일이다. 뉴욕 타임스는 뉴욕필 관계자의 말을 인용, 힐이 9월 뉴욕필의 간부를 만나 평양 방문을 적극 권유했다고 전했다. 뉴욕필의 대표인 자린 메타 등이 지난주 방북, 북한 관계자들을 만날 때도 국무부 직원이 동행했다. 뉴욕필의 베이징 공연이 내년 2월 7~25일 예정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 언저리에 평양 공연이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뉴욕필은 1950년대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소련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뉴욕필 측은 9월 중순 북한 외교관이 직접 들러 공연문제를 협의했다고 말했다. 태권도시범단의 미 5개 도시 순회공연을 관장하고 있는 장웅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은 “시카고 세계 권투선수권 대회에도 북한 선수 3명이 출전한다”고 밝혔다.

◇상징성 큰 대북 식량 지원=북한의 수해 발생 직후인 8월 31일 미 국무부는 ‘위로 성명’을 냈다. 성명은 “북한의 식량 부족분이 100만t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이번 수해로 상황이 더 악화됐을 것”이라며 “미국은 북한 관리들과 상당 규모의 식량 지원 및 모니터 문제를 협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2005년 북한이 세계식량계획(WFP) 요원들을 추방하면서 지원을 중단할 때까지 10년 동안 미국은 대북 최대 식량지원국이었다. 모두 200만t을 지원했다. 99년 금창리 핵 의혹시설 사찰 대가로 지원한 쌀 50만t(옥수수 10만t 별도)은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지원 규모는 이와 맞먹을 것이라고 소식통은 전한다. 부시 대통령이 8월 30일 북핵 문제에 대해 “나는 이미 선택을 했다”고 밝힌 이래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 유화책이다.

◇힐-라이스의 탄탄한 입지=정부 당국자들은 미 외교안보 라인의 역학관계도 주목한다. 부시 대통령은 3일 대북 강경파인 체니 부통령과 함께한 자리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힐 차관보를 칭찬했다. 현실주의 노선의 대북 협상파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현재의 대북정책 기조가 지속될 것이란 메시지라는 풀이다.

북한 역시 9월의 제네바 북·미 관계정상화 회담에서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 의혹과 관련, 일부 장비 구입 사실을 시인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힐 차관보는 불능화의 수준과 관련해 9월 말 6자회담 직전에는 “재가동하는 데 수년이 걸릴 정도”라고 했으나, 5일 미 공영방송인 PBS와의 인터뷰에서는 “상당개월이 소요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낮은 수준의 불능화를 해서라도 이후 조치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북·일 선양 접촉 이뤄지나=13일 북한의 송일호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담당 대사와 야마다 시게오 일본 외무성 북동아 과장이 13일 오후 비슷한 시간 중국 선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송일호 대사는 선양 타오셴 국제공항에 도착한 직후 일본과 접촉 여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없다”고 말했다. 김철호 북한 외무성 아시아국 부국장은 목격되지 않았다. 일본 측도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주국장이나 미네 요시키 일·조(日·朝) 국교정상화 교섭담당 대사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상태여서 양국 회담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비밀리에 북·일 간 접촉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돌고 있다. 양측 관계자가 선양에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