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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참 출판인' 한창기의 올곧은 삶과 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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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한창기 지음,
윤구병·김형윤·설호정 엮음,
휴머니스트,
352쪽, 1만6000원

한 꼬장꼬장한 이가 있었다. 주변에서 그에게 망원경을 선물했다. 말과 글에 너무 꼼꼼해 지긋지긋할 정도니 ‘좀 멀리 보고 크게 볼 줄도 아시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정확성과 논리성을 따지다 나중에 서기가 해도 될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너무나 많고, 서기가 너무나 적다. 나는 나와 함께 서기 노릇을 하고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쁨을 느낀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대표로 일했고 월간 ‘뿌리 깊은 나무’(1976~80)와 월간 ‘샘이 깊은 물’(84~ )의 발행·편집인이었던 한창기 선생(1936~97·사진) 얘기다. 1980년 신군부가 ‘뿌리 깊은 나무’를 폐간시켰을 때도 굴하지 않았다. 잡지의 새 바람을 일으키며 ‘출판물에 진정한 주체성을 부여한 최초의 출판 언론인’으로 불렸다.

한창기 선생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은 책을 세 권 냈다. 언어에 대한 성찰을 담은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전통과 민속문화를 다룬 『샘이 깊은 물의 생각』, 문화 시평을 엮은 『배움 나무의 생각』이다.

특히 『뿌리…』에서 선생의 토속말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다. ‘무엇이 필요하다’ 대신 ‘무엇을 필요로 한다’라 하고, ‘무엇 속의’를 ‘무엇에 있어서의’라 하는 식자층에 대한 비판이 송곳 같다. 아무 말도 되지 않는 ‘~해 마지 않습니다’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정치인, ‘모인다’ 하지 않고 ‘모임을 가진다’는 서양식 표현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당대 풍물과 사회 변천도 생생히 녹아 있다. 70년대 한 양장점에서 서양 여자를 채용해 옷을 만지작거리게 하고 손님에게는 ‘서양 여자도 탐내는 제품을 파는 가게’라는 인상을 주었다는 우스꽝스런 일화가 예다. 외국 사람이 ‘고맙습니다’ 할 때 한국인이 무의식적으로 ‘미안합니다’ 말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책은 일부 글은 젊은이에게는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문물에 밝았으면서도 판소리 감상회를 100회나 개최하고, 버려지던 놋그릇, 백자의 가치를 설파하며 “진정한 현대성은 전통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던 선생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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