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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할말은하자>3.여론 눈치만 보는게 정치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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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6년전의 일이다.서울 올림픽을 한달정도 앞둔 88년 8월13일,金容甲당시 총무처장관은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간담회를 자청하더니 폭탄과도 같은 말을 했다.
『全大協등 학생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 나라가 민주화되는 게아니라 金日成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다.올림픽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수호도 더 중요하다』면서『올림픽 후 중간평가에 좌경세력을 척결하겠다는 항목을 넣고 국민 심판을받아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당시 與小野大 정국은 벌집을 쑤셔놓은듯 했다.재야.학생 운동권.세 야당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極右준동의 본격 징후라며즉각 引責하라는 공세가 펼쳐졌다.
이때의 사회분위기는 민주주의와 좌익이 혼돈된 상태였다.
좌익학생들의 운동이 민주주의 운동으로 포장되고 있었기 때문에이들을 비판하면 민주화 바람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두려워 지식인들과 지도층인사들이 학생들 눈치만 봤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계기사 3面〉 5공화국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세찬 여론을 의식해 학생들의 행동이 우리체제를 위협하는 선을 넘어섰는데도 눈치만 보며 수수방관했다.
정치권 역시 학생들에게 아부하며 심지어 이를 역이용,당시 정부를 곤궁에 몰아넣는데만 열중했다.
金前장관은 당시상황을 돌이켜보면서『좌경학생들에 대한 경고는 법무나 내무장관이 해야 했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어 내가 나섰다』고 회상했다.당시 그의 발언을 놓고 민주화 세력의 중추인 재야.운동권 학생을 몽땅 급진. 극좌 공산세력 으로 단순화시킨 발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었다.
〈高道源기자〉 그러나 그는 자기 나름의 확고한 신념의 눈으로일찌감치 좌경의 싹을 직시하고 용감하게 할말을 한 고독한 사람의 하나였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가 한동안 닦달당하고 있었던 바로 그 무렵에 또 한사람의 고독한「極右준동」이 나타났다.같은해 8월말에 출간된『現代公論』(88년8월호)에 梁東安정신문화연구원교수가「右翼은 죽었는가?」고 외치고 나온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좌익은 이미 대학가와 노동자 사회를 장악했으며 문화.예술.언론.출판.종교.교육계에 거의 빠짐없이 침투해 조직적 思想공세를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이제「민간 右翼」이 궐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연히「극우 잔당」「강경 매카시스트」라는 비난이 우박처럼 쏟아졌다.한번쯤 걸러질 법한 당시 우리사회의 좌경화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가 건강한 토론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끝내 중도에 끊겼다. 梁교수는 당시 지식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좌익을 비판한 학자였다.
대학의 교수들은 학생들의 눈치를 보느라 할말을 못하고 침묵을지켰으며,일부 교수들은 인기를 위해 학생들의 입맛에 맞는 소리만 골라했다.
그래야만 지식인 행세를 하는 세상이었다.
88년 5월,姜信玉의원(民自黨.전국구.88년 당시엔 통일민주당 서울 麻浦乙)은 사무실에 몰려온 民家協 회원.학생들에게『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나 하라』고 외쳤다.「人權 변호사」에 야당의 인권옹호위원장을 맡은 사람의 입에서나올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쟁점이었던「양심수 석방 특별법」제정문제에 대해 법체계를 혼란케 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당연히『변절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그는 민주화 세력의 배신자처럼 취급됐다.그런데도 그는『특별법 제정은 법체계를 흔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정치인의 말은 시대를 결정하고 역사의방향도 좌우한다.그러나 일시적 인기.시류.대세를 좇는 말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인기영합의 비겁함과 구차스러움만이 드러날 뿐이다.
『할 말을 안하는 것을 德인양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할말을 분명히 해 국민을 설득하는 성숙된 정치 문화가 정치와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宋梓연세대총장의 지적도 귀담아 들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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