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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85.공천탈락 권익현 6공 최대 祭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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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8년3월18일 민정당은 13대 지역구 국회의원 공천결과를 발표했다.
공천결과 발표는 당초 빠르면 15일께,늦어도 17일께에는 이뤄질 예정이었다.그런데 몇차례나 늦춰져 이날에야 비로소 발표된것이다. 예정보다 늦춰진 시간은 6共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막판 뒤집기」,즉「5共 인물 자르기」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黨심사위원회는 당초 예정됐던 15일까지 이미 심사를 끝내고 16일부터는 그냥 아무 일 없이「보안상 이유」로 강남의 安家에갇혀 있었다.「보안상 연금」이란「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공천내용이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밀실 공천의 형식적절차에 불과했다.모든 상황은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이미 이날 오후부터 공천결과는 인쇄작업에 들어갔으며,당 관계자들은 공천이확정된 선량 후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면서『서류 준비해가지고 앰배서더호텔로 나오면 된다』는 등 후속절차에 대한 조언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밤 늦게,보다 정확히 말해 자정을 넘겨 다음날인17일 새벽1시쯤 청와대에 최종보고차 나갔던 沈明輔사무총장이「死色」이 되어(한 심사위원의 표현)돌아왔다.안가에 들어서자마자그는 기다리던 심사위원들에게『다시 (심사)해야 되게 생겼다』고소리쳤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沈총장이 청와대에 가지고 올라간 최종 보고안은 이미 수차례 청와대.안기부와 사전조율을 거친 결과였기에 더이상의 교체는 에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 지 생각지도않았던 중진을 포함한 10여명에 대한 막판 물갈이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13대 총선의 막판 뒤집기는 이렇게 공천발표 직전 갑작스럽게 청와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뒤집기의 핵심은 심사위원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兩權」씨(權翊鉉.權正達).두 사람은 5共의 실세로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탄탄한 정치적 세력과 지역적 기반을 갖췄기에 심사위원들도 공천탈락을 거론하지 않았던 거물.그러나 이들은 바로 「5共 거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천에서 탈락된 것이다.이들은 물갈이의 제1원칙인「5共 청산」이라는 명분앞에 바쳐져야만 한 제물이었던 셈이다. 특히 극적인 뒤집기를 당한 사람은 兩權중에서도 육사선배인「큰 權」權翊鉉의원이었다(權翊鉉의원은 육사11기로 15기인權正達의원의 4년 선배).
「劇的」이라는 표현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첫번째는 그가 6共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였기에 그의 공천탈락은 인간관계 차원에서 의외라는 뜻이었다.경남 산청출신이지만 일찍부터 대구에 나와 자라 사실상 盧대통령과 동향이나 마찬가지인 權의원은 盧대통령과 같이 육사 11기로 군생활을 시작했고,같은 하나회 회원이었다.
權의원은 일찍이 尹必鏞사건때 대령으로 군복을 벗었지만 교우는 변함이 없었다.그래서 權의원은 5.17이후 신군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무임소장관 보좌역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40년을 함께 해온 이들간의 친교는 단순한 친구사이 이상이었다.盧대통령의 부인 金玉淑여사가 흔히 말하던 것처럼『민정이네(「민정」은 權의원 장녀의 어릴적 이름)숟가락 젓가락 숫자까지 안다』는 정도의 사이였다.
인간적인 면에서 그의 공천탈락은 상상할 수 없었다.
둘째는(盧대통령이 의도했든 아니든)權의원은 盧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공천확정 언질을 받았는데 바로 이틀뒤 盧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 전격적으로 탈락됐다는 것.이 과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다.뒤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심사위원들을 경악하게 한 兩權의 탈락은 사실 갑작스러운 것이아니었다.워낙 권력핵심 깊숙한 곳에서만 논의돼 온 일이라 갑작스럽게 보였을 뿐이었다.
6共 핵심관계자 E씨는『6공화국 출범 전후부터「획기적인 물갈이」의 필요성이 제기됐지요.새 정부가 출범,해야할 중요한 일은사실 출범 전에 이미 밑그림이 다 그려져 있었죠.특히 총선은 새정부 출범후 곧 이어 예정된 일인데다 정권기반 을 다지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朴哲彦에 의해 일찍부터 준비가 시작됐죠.물론 극히 일부에서 얘기된 것이기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챈 사람은 거의 없었죠.획기적인 공천 물갈이의 수준을 정확히 알고있었던 사람은 물갈이론을 ■도했던 朴哲彦씨 정도였을 거예요.물론 대통령의 처남인 金復東,동서인 琴震鎬씨등 패밀리그룹이 논의에 깊숙이 관계했고,安武赫안기부장.崔秉烈정무수석.李春九의원등 공천에 직접 관련된 핵심 관계자들은 대강 윤곽정도를 감지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또다른 6共 관계자 W씨 역시 같은 맥락의 주장을 했다.그는『내부적으로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죠.그런데 安부장이나 李의원등군출신들은 같은 군출신인 兩權씨등의 공천 탈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죠.실제로 安부장은 공천작업이 시작되기 훨씬 전 청와대로부터 兩權씨등을 잘라내라는 물갈이 지시를 받고는 盧대통령을 직접찾아가 반대의견을 전달했죠.이에대해 盧대통령은 확실한 언급없이모호하게 대답했다더군요.安부장은 盧대통령의 이런 모호한 태도를보고 자신의 반대의견이 받아들 여져「획기적 물갈이 구상은 무효화됐다」고 해석했습니다.그러나 획기적 물갈이 구상은 여전히 살아있었죠.
安부장은 공천심사작업 막바지에 또다시 兩權을 자르라는 청와대의 지시를 받게 되었고,그때는 이미 대통령의 마음을 돌릴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이때부터 安부장이나 李春九의원등 군출신1등 창업공신들이 이미 황태자 朴哲彦에 의해 겉돌기 시작했던 것이다.여기서부터 창업공신 원로와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황태자 朴哲彦과의 갈등은 본격화되며,이는 총선후 권 력 내부갈등과분화로 전개된다.
이후의 정황은 6共 관계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가장 극적인 뒤집기를 당한 權翊鉉의원을 중심으로 당시 급전하는 정황을 추적해보자.
權의원은 이미 권력 핵심부내의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난데없이 주일대사說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스스로의 위상을 고려해볼때 자신과 일언반구 의논도 없었던 얘기가 권력 핵심에서 흘러나온다는 자체는 이상신호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선거가 끝난날 자축파티를 가진 이후 지역구에 일절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공천신청도 끝까지 미루다가 마지막날 마감직전 신청서류를 제출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런 權의원의 늑장 신청을「거물의 여유」로 착각,그많은 정치지망생중 權의원의 지역구인 산청에는 감히 공천을 신청한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이 때문에 갑자기 그가 공천에서 탈락하자 산청에는 대타가 없어 공천발표때 유일하게공란으로 발표되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다.
13대에 민정당후보로 산청에서 출마해 당선된 盧仁煥의원은 당초 부산지역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한 인물.뒤늦게 공천발표후權의원의 탈락으로 산청이 無主空山이 되자 이곳을 지망해 공천을받았다. 그런데 공천발표가 임박한 3월14일 월요일 청와대에서대통령과 단 둘이 만나 오찬을 함께 하는 스케줄이 權의원에게 통보돼왔다.낭보가 아닐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날 오찬회동에서 盧대통령은 權의원에게『왜 지역에 안내려가고 있나.빨리 지역구 다져놓고 다른 곳도 지원해주어야지』『열심히 해 전국 최다득표를 해달라』『13대 국회에서도權고문의 힘이 필요하다』는등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의 이같은 격려는 공천확정을 의미한다.비로소 안심한 權의원은 챙겨줘야할 다른 사람의 공천을 부탁하기도 했다.그 정도로 여유가 있는 즐거운 오찬이었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격려용 금일봉까지 내놓는 대통령을 보고權의원은 동지 애와 우정에 가슴이 뭉클했을만 했다.
權의원은 바로 지역구인 경남 산청으로 내려가 16일부터 산청여고 강당에서 지역별 당원교육에 들어갔다.
5共의 거물로서 지역기반을 탄탄히 다져왔기에 조직은 곧바로 활기차게 움직였다.權의원은 전국 최다득표를 외치면서 당원들을 독려해갔 다.
***당원독려하다 날벼락 공천탈락이라는 悲報가 날아든 것은 바로 다음날인 17일,공천발표 하루 전이었다.
權의원은 이날도 오전부터 강당에서 당원교육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석간신문에공천탈락 대상이라는 예고기사 가 대서특필됐다는 연락이었다.
같은 시간 權의원만큼 놀란 표정으로 신문을 읽고 있던 사람은공천심사위원장인 蔡汶植민정당대표였다.그는 국회의 대표실에서 석간신문을 보고는 당장 신문사에 전화해 항의하고는 친분이 있던 정치부장을 국회 대표위원실로 불렀다.기사삭제를 요구했다.그러나정치부장은『믿을만한 청와대 소식통』이라며 기사내용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蔡대표는『당대표이고 공천심사위원장인 내가 모르는 일인데 무슨 소리냐』며 誤報임을 주장했다.그래서 몇시간뒤 다시 인쇄하는 2판 신문에서 權의원의 공 천탈락 기사는 빠졌다.
다시 權의원에게『기사가 2판에서 빠졌다』는 연락이 왔다.지구당에 모여있던 당원들은『그러면 그렇지.우리 의원님이 공천에서 빠질 리가 있나』하며 안도하는 분위기였다.그러나 權의원 본인은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이때 蔡대표로부터『빨리 서울로 올라오라』는 전화가 왔고 즉시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한편 權의원의 귀경을 독촉한 蔡대표는 바로 청와대로 향하고 있었다.그 역시 뭔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을 갖고 있었다.「萬의하나」權의원의 탈락이 기정사실일지라도 당대표로서 진력을 다해 대통령을 설득하면 번복할 수도 있으리라 낙관하기 도 했다.그러나 이미 蔡대표가 생각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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