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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84.13대總選 물갈이 公薦 월계수 浮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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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치판을 뒤흔드는 4년 주기의 대규모 물갈이 국회의원 공천은권력이동의 클라이맥스와 같다.공천이란 또 정치권력이 구체적인 인물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힘을 겨루는 眞劍勝負이기에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다.그래서 평소 수면하에서만 맴도는 권력세계의 비정한 메커니즘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까닭에 권력탐구의 핵심포인트이기도 하다.
6共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13대 총선 공천은 권력의 새출발과 맞물렸기에 더욱 치밀한 물갈이 과정이었고,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부침해갔다.절대적인 권력의 의지에 따라,혹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등 여러가지 변수에 따라 정치적 명운이 갈렸다. 결론부터 말해 공천과정을 통해 구현된 6共 권력 의지의 요체는「5共 그늘로부터의 탈출」과 5共 그늘을 대신하는「월계수회의 정치세력화」였다.
「5共 그늘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곧 6共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자리잡기 위한 공간확보라면「월계수회의 정치세력화」는 5共 세력이 물러난 공간을 6共 사람으로 채우는 포석 과정인 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6共 권력의 출발점인 포석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 월계수회라는 점이다.
이는 월계수회의 리더였던「황태자」朴哲彦의 독보적인 위상을 가장분명하게 확인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다른 감상 포인트는 6共의 치밀한 사람 자르기.
당시까지만해도 6共은 5共의 후계라는 인식에서「비록 정권은 바뀌었지만 물갈이의 폭이 그렇게 크지 않을것」이라고 흔히들 전망했다.그러나 朴哲彦등 6共 핵심들은 이같은 일반적 인식과 달리 냉혹한 권력 생리에 따라 통치에 부담이 되는 인물은 확실하게 잘라냈다.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 현장인 공천과정을 조목조목 살펴보자.
본격적인 공천심사 작업이 시작된 것은 총선 48일전인 88년3월9일이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공천심사위원을 선정할 때부터 있었다. 통상 공천심사위원은 지역별로 중진의원 한사람씩을 선정한다.13대 총선 공천 과정도 마찬가지였다.일단 蔡汶植 黨대표를 위원장으로 하고 지역별로 沈明輔사무총장(江原).南載熙정책위의장(서울).李大淳원내총무(全南)등 당3역 외에 李漢東( 京畿).
李春九(忠北).高建(全北).金重權(慶北).鄭順德(慶南).柳興洙(釜山)의원등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忠南대표가 없다.당에서는 『충남북 합쳐도 별로 크지 않으니 李春九의원이 충남북을 전부 맡으면 된다』고 설명했지만 석연찮다.
석연찮은 구석에는 다 속사정이 있게 마련이다.물론 당초 忠南지역을 대표한 공천심사위원도 있었다.公州출신의 중진 鄭石謨의원이었다.그는 불과 한달전까지만 해도 민정당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이었다.
당시 한 관계자 Q씨는 『청와대 결재과정에서 충남은 충북대표인 李春九의원이 겸임하면 된다는 지시와 함께 鄭石謨의원을 빼버렸지요.이는 大選기간중 사무총장이었던 鄭의원이 적극적으로 뛰지않았다는 평가 때문이었죠.그때부터 미운 털이 박 힌 그는 비협조적인 5공 인사로 낙인찍힌 셈이죠』라고 설명했다.공천심사는 주로 黨이 내놓은 자료를 보고 낙점하는 방식이었다.주로 지역별로 그 지역을 맡은 심사위원의 의견에 많이 좌우됐다.
그런데 심사 과정에도 문제는 많았다.미리 결정된 명단이 청와대로부터 날아드는 것이었다.메신저는 黨쪽의 沈총장 외에 청와대의 崔秉烈정무수석과 안기부의 安武赫부장.李相淵차장등이었다.이들은 밤늦은 시간에 나타나 낮동안의 심사결과를 들은 뒤 몇가지 지침을 전달하거나 의견을 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외부에서 결정돼 통보되는 공천 확정자가 대부분심사위원들이 잘 모르는 무명인사라는 것이다.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공천심사위원이었던 X씨는『위에서 떨어지는 명단을 보면 황당했어요.심사위원들끼리 서로 물어봐도 몰라요.나중에 보니까 대부분월계수와 관계가 있더군요.월계수가 대선 과정에서 功이 있었으니그럴수 있다고도 볼수 있죠.그런데 정도가 지나 쳤죠.예컨대 경남 합천의 金容鈞씨(前 체육부차관)나 광주 북구의 池大燮씨(현民自黨지구당위원장)같은 인물은 그래도 朴哲彦의원과의 특별한 관계가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었기에 서로 얘기하다보면 배경을 알아챌수 있었죠.그런데 부산 사하구의 崔모씨 같은 사람은 완전히 무명인데 공천확정으로 통보돼 오더라구요.모두들「무슨 빽인데 이렇게 든든한거야」라고 의아해했죠』라고 기억했다.
여기서 언급된 세곳의 지역구는 모두 하나씩 되짚어볼만한 곳들이다.각각 13대 공천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들인 동시에 정치판의 명암과 부침이 몹시 운명적임을 시사해주는흥미로운 경우들이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의 기억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慶南 陜川은 알다시피 全斗煥 前대통령의 고향.全대통령이 공천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후보를 지명한 유일한 지역으로 알려졌다.결론부터 말해 막강한 월계수회 초기 멤버임에도 불구하고金容鈞씨는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다.물론 全대통 령의 반대 때문이었다.
金씨는 朴哲彦의원과 동갑으로 서울大법대 동문.그는 80년 5.17 당시 군 법무관으로 국보위활동에 참여해 활동하던중 新군부에 의해 발탁됐던 朴哲彦검사와 재회했다.월계수회 핵심멤버중 공천을 받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全대통령이 대신 추천한 인물이 權海玉씨(現 民自黨수석부총무)였다.당초 全대통령은 동생인 全敬煥씨를 공천하고 싶어했다.그러나 여론도 좋지 않고 6共측에서도 반대하자 임시방편으로 지역구 관리를 맡기고자한게 權씨였던것이다.權씨는 5,6共 갈등의 와중 에 漁父之利를 얻은 행운아인 셈이다.
당시 공천 관계자 Z씨는 그 배경에 대해『몇차례 출마해 낙선한 경험이 있는 權씨는 당시 全대통령의 형 全基煥씨를 찾아가 지원을 호소했죠.權씨는 공천 협조를 당부하면서 다음 선거에 全敬煥씨가 나올 경우 지역구 양보 가능성까지 말했다 고 하더군요.全대통령은 월계수 핵심이었던 金씨보다「위탁관리」를 시사하는 權씨에게 공천을 주는 것이 나중에 돌려받기 편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보입니다.어쨌든 權씨는 그렇게 출마해 당선되는 바람에 이제는 재선의원까지 된「운좋은 사람」이고 金씨는 하필이면 합천 출신이라 금배지를 못 단「운나쁜 사람」이죠』라고 말했다.
두번째로 光州北區의 경우를 살펴보자.池大燮위원장은 월계수회의핵심중 핵심.사업가인 그는 경북고출신인 친척의 소개로 일찍부터朴哲彦의원과 친하게 지내다가 월계수회를 만들면서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朴哲彦의원을 포함한 다른 월 계수회 핵심들이대개 전국구로 확실하게 원내에 진출하는 편안한 방법을 택했음에도 池씨는 지역구를 원했다.光州라는 지역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그는 정면승부를 택한 것이다.光州에서 민정당후보로 당선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대선승리직후 월 계수회의「대권을 만들어냈다」는지나친 자신감이기도 했다.하지만 선거가 늦어지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양 金씨,특히 金大中씨의 황색바람앞에서 호남의 월계수회는무력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낙선했다.이는 정면승부에의 지나친 자신감으로 화를 스스로 부른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釜山沙下區는 또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원래 分區되기전 이곳은 부산서구로 5共 강경파인 郭正出의원 지역구다.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5共이전 이곳은 金泳三씨의 아성이었다.이 지역의 터줏대감인 거물 金泳三 民主黨총재가 오랜 정치 규제에서풀려나 다시 이곳에서 출마하게되자 郭의원은 분구되는 사하구로 피하고자 했다.그러나 사하구에는 郭의원 밑에서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崔씨가 어느새 월계수회원으로 변신,공천을 확보하고 있었다.이미 郭의원의 힘으로는 밀어낼수 없었다 .5共시절이면 밀어낼수 있었겠지만 郭의원은 자신의 공천마저 낙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진퇴양난의 郭의원은 호랑이굴인줄 뻔히 알면서도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서구의 공천을 받았다.물론 낙선했다.하지만 정치판의 塞翁之馬.郭의원은 3당합당후 대선을 앞두고 金泳三대표가 전국구로 가면서 지역구를 물려줘 14대에서는 거꾸로 YS의 후광을 업고 당선,13대에서 도태됐던 5共 인물 대다수와 달리 재기할 수 있었다.
이상의 사례에서 본 몇몇 정치인들의 부침은 대단히 운명적이다.그러나 그 운명의 뒤에는「5,6共 갈등」과「월계수」라는 권력갈등의 변수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漁父之利 행운아도 특히 월계수회의 위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는 무명 월계수가 忠北槐山의 중진 金宗鎬의원을밀어내려고 했던 사실.金의원은 내무관료로 출발해 충북지사.내무부차관을 거쳐 불과 1년전까지 내무부장관을 지낸 입지전적 인물.요직을 거치면서「지역구인 괴산의 논두렁까지 다 포장해 놓았다」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지역구를 확실히 다져놓았기에 그의 공천은 당연했다.
그런데 Q씨는『당시 金의원 대신 서울大 법대를 졸업한 무명인사가 위로부터 추천됐지요.충남북을 담당했던 실세 심사위원 李春九의원도 몰랐던 인물이었나봐요.李의원이 누구를 향해서인지「이거무슨 장난들 하는거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 다.아마 그자리에는 없었던 朴哲彦의원을 향한 고함이었을 거예요.李의원이「괴산에서 金宗鎬 빼고 누가 당선될 것 같아」라고 소리를 질러대 金의원으로 확정될 수 있었죠』라고 기억했다.
李春九의원만 해도 창업공신이나 되니까 낙하산 월계수를 비토할수 있었다고 한다.나머지 대부분 월계수는 낙하산을 타고 지역구에 안착했다.보다 정확히 말해 이들중「진짜 월계수」(대선때부터활동해온 월계수)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공천을 따기위해 황태자 朴哲彦에게 접근한「철새 월계수」라 할 수 있다.그런데 13대 공천의 하이라이트는 뜻밖의「막판 뒤집기」였다.막판뒤집기는 6共의「5共 탈출」그 자체였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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