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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잔으로 양주마시는 대주가/정동성전장관이 만나본 김정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4·19세대 밝히자 “학생지도자 높이 평가”
『우리 세대가 북남간에 벽을 허물어야 합네다.』 90년 10월13일 새벽 평양의 권부에서 있은 김정일의 육성.또렷또렷하면서 평안도 사투리는 강하지 않았다.김의 대화상대자는 남북통일축구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찾은 우리측 단장인 정동성체육장관(현 여주전문대 이사장).
정장관은 자기를 4·19세대라고 소개했다.그러자 김정일은『학생운동지도자 그런 사람들 우리 높이 평가합네다』라고 치켜세웠다.
그의 김정일 면담은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은 내용.김정일은 그당시 늘 배후에 있었다.그는 중국지도자들과 만날때나 모습을 드러냈고 8년간 북한에 있었던 최은희·신상옥부부가 그를 만난 정도다.85년 장세동안기부장의 평양 밀행때도 나타나 지 않았다.카터 전미대통령도,황석영씨도 그는 만나지 않았다.그런점에서 남한 장관과 만난 것은 극히 파격적이다.
정장관은 서울에 돌아와『김정일이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그가 편집광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세련됐다』고 노태우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면담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선수단·보도진 일행 76명을 이끌고 들어갔던 4박5일간의 평양체류 마지막밤인 10월12일.정장관은 저녁 연회장인 목란관의 환송연에서 노래를 부르고,술도 들고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허리를 뒤로 꺾는 재주도 보였다.
연회가 끝난뒤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잠자리에 들려던 정장관은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북측 최용해축구협회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는『꼭 갈때가 있습네다』하며 정장관을 차에 태운뒤『「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기다리고 계십네다』고 했다.15분쯤뒤 별장풍의 건물에 도착했다.
김정일은 반갑게 맞으면서『앉읍시다』고 했다.그리고『장관선생 허리가 어드레 부드러우냐』고 분위기를 잡았다.김은 폐쇄회로 TV로 정장관의「묘기」를 본듯했다.
술상에는 조니워커중 고급인 블랙 올디스트가 올라있었다.먼저 김정일이 맥주잔에 가득채워 스트레이트로 한번에 마셨다.김이 대주가임이 확인된 장면이다.최·신부부는『새벽까지 김이 위스키 파티를 열 정도로 정력적인 건강을 과시했다』고 회고 한적이 있다.
전작이 있는 정장관은 취하면 큰일날 것같아『우리는 석잔을 마신뒤 잔을 돌린다』고 둘러대자 김은 술 권하는 것을 그만뒀다.이브닝 드레스형 옷차림인 미모의 여성 2명이 시중을 들었다. 김은 정장관에게 나이를 물었다(정장관은 39년생,김은 42년생).그리고는『장관 선생이래 저보다 선뱁니다』고 했다.오만하다는 선입관과 달랐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김은『분단 40년간 북남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 사업입네다』고 했다.『나도 공감입니다.함께 노력합시다』고 정장관은 맞장구 쳐 주었다.김의 이야기는 자신감있고 당차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더니 김은『미군이 나가야 합네다.그네들 때문에 통일에 지장이 있습네다』라는 얘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최와 군복차림의 고위장성이 배석했다.최(현사노청위원장)는 김일성 사후 주목받고 있는「김정일 사람들」의 주축을 이루는 혁명1세대 자녀출신(82년 숨진 최현인민무력부장의 아들).김의 주변에 혁명1세대 자녀 출신들이 포진하 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당시 정장관의 카운터 파트인 김유순 국가체육위원장은 간판일뿐이며 최가 실세라는 소문이 있었다.
정장관은『김의 위로 올리는 머리가 약간 곱슬이며 신장 1백63㎝,체중 80㎏으로 배가 나와 뒷짐을 지게 돼있다』고 보고했다.이례적 면담에 대해 당시 한 관계자는『정장관의 여러가지 우호적 제스처,김정일의 체육에 대한 관심,최의 건의 등이 작용한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씨는 13일『오랜 후계수업때문이지 김은 당당하고 자신감에는 어색함이 없었다』고 회고했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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