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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송 오찬장은 남북대화 이끌 北 3인방 ‘데뷔 무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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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04면

4일 오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주최로 열린 노무현 대통령 환송 오찬장은 새로 시작되는 남북대화 대표들의 상견례 자리가 됐다. 헤드테이블 왼쪽부터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 김장수 국방장관, 권양숙 여사, 노 대통령, 김 위원장, 김우식 부총리, 김영일 북한 내각 총리. [연합뉴스]

2007 남북 정상회담 마지막 날인 4일 오후 백화원 영빈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주최의 노무현 대통령 환송 오찬장은 다음달부터 시작할 새 남북대화 대표의 상견례 무대였다. 두 정상은 바로 직전 10·4 선언을 통해 세 개의 남북대화에 합의했다. 총리·국방장관 회담(11월),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가 그것이다. 북측의 의전은 치밀했다. 두 정상이 함께한 헤드테이블(주탁)에 김영일 총리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을 앉혔다. 총리·국방장관 회담 대표다. 1번 테이블(1탁)에는 노두철 내각 부총리가 앉았다. 부총리급 경협공동위원회 대표가 확실한 인물이다. 오찬장은 김 위원장이 이들을 남측 정부 요인과 경제인들에게 소개시키는 자리였다.

남북대화 경험이 전혀 없는 김영일에겐 학습의 장이었다. 카운터파트인 한덕수 총리는 방북하지 않았지만 이번 회담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첫날 노 대통령 환영식과 10·4 공동선언 서명식에도 참석했다. 2000년 정상회담 당시 홍성남 총리가 이들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점에 미뤄보면 파격적 조치다. 북한 내각의 총리는 형식상 권력 서열이 김정일·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에 이어 4위(4·25 군 창건일 열병식 주석단 기준)지만 실권은 노동당 부장보다 작다는 평가들이다. 그의 참석은 총리회담을 내다본 포석이라는 풀이다.

김일철은 영접 행사에도 참가했다. 2000년 정상회담 당시에도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그는 영접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오찬장에서 김장수 국방장관 바로 옆에 앉아 탐색전을 벌였다. 김 장관에게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우리 민족끼리 갈등을 해결하자”고 했다. 김 장관은 “듣기로 김일성 주석과 김 위원장도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균형자 역할에 대해 반대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응수했다. 정식회담을 앞둔 기싸움이었다. 노두철은 1번 테이블에 함께한 남측 경제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카운터파트가 될 권오규 경제부총리와도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합의한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 재계의 적극적 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들 세 명의 전면 등장은 남북 장관급회담 종막의 신호탄이다. 장관급회담은 2000년 정상회담의 산물로, 5월까지 21차례 열렸다. 총리회담과 경제·군사 분야 각료회담이 시작되면서 그 역할을 넘겨줘야 할 때가 됐다. 환송 오찬장은 이를 방증했다.

김영일·김일철·노두철의 등장은 상견례 이상의 뜻이 숨어 있다. 모두 10·4 합의 실천과 떼놓을 수 없는 경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일은 올 4월 총리에 오르기 전까지 13년 동안 육해운상(장관)을 지낸 육해운수 분야 전문가다. 나진 해운대 졸업 후 육해운부(현 육해운상)에서 잔뼈가 굵었다. 역대 총리가 내각과 노동당을 오간 비중 있는 인물인 데 비해 그는 내각, 그것도 육해운상에서만 일했다. 그는 노 대통령이 둘러본 남포의 영남 배(선박) 수리 공장 책임을 맡아 실적을 올리면서 일약 총리에 발탁됐다. 김 위원장은 2005년 이 공장에 새로 건설한 2호 도크 현지지도를 하면서 김영일에게 “대단하다. 소리 소문 없이 큰일을 했다”고 칭찬했다(조선중앙통신). 그는 10·4 합의 가운데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남포와 안변의 조선 협력단지, 철도·도로 개·보수를 직접 챙길 것으로 보인다. 당초 그의 총리 기용은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회담의 북측 실무를 책임진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같은 시기에 국방위 참사에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김일철은 해군사령관(1982년) 출신. 98년 인민무력상(현 인민무력부장)에 올라 2000년 9월의 제1차 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했다. 한국전쟁 때는 해군 부전대장·전대장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현재는 북한 군사외교의 중추다. 북한이 서해의 사실상 해상경계선인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와 도발은 그가 인민무력상에 취임한 다음해부터다. 연평해전(99년 6월)→서해상 군사분계선 선포(99년 9월)→백령도 등 서해 5개 섬 통항질서 공포(2000년 3월)→서해교전(2002년)은 대표적 예다. 그는 서해상 공동어로수역 설정을 둘러싼 협의에서 NLL 무력화를 위해 파상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

노두철은 남한 자본 유치에 큰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국제합영총회사 이사장도 겸임하고 있다. 그는 중국·조총련과의 경협 창구를 맡아 왔다. 주알제리 대사관 참사관,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자재공급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2003년 현직에 올랐다.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과 최용해 황해북도 당비서가 등장한 점도 주목거리다. 장성택은 노 대통령 환영 행사와 환송 오찬장에 모습을 드러내 건재를 과시했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최고 실세였던 그는 2004년 초 분파 행위로 업무 정지 처벌을 받았다가 2005년 말 현직에 올랐다. 이후 한동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다가 정상회담 직전인 지난달 말 김 위원장을 두 차례 수행했다. 환송 오찬장에서 노두철과 같은 1번 테이블에 앉은 그는 남북 경제협력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앞으로 남북 경협에 깊숙이 개입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는 2002년 북한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방한한 바 있다.

최용해는 김일성 주석의 빨치산 동료로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최현(82년 사망)의 아들.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98년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로 재직하던 중 오직 사건으로 해임됐다가 2003년 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복권했으며 지난해 현직을 맡았다. 이번에 군사분계선에서 노 대통령을 영접한 것을 계기로 중앙 복귀가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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