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안락한 삶을 버리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호 10면

야구 모자에 점퍼 차림의 이계민씨는 예순 나이가 무색하게 에너지가 넘쳤다.

잉카제국의 마지막 적통(嫡統) 황제는 우아스카르다. 그는 이복동생 아타우알파의 반역으로 황제의 자리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 덕(?)에 우아스카르는 더 큰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돼지 사육사 출신인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잉카제국을 내주는 마지막 황제 역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주가 만난 사람-페루에서 환경봉사하는 이계민씨

페루의 최고봉인 우아스카란(6768m)은 그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6000m급 봉우리 40좌와 5000m급 봉우리 500여 좌를 거느린 안데스 블랑카 산군(山群)의 황제다.

예순셋의 나이에 우아스카란 정상에 선 기분은 어땠을까. 5000~6000m 높이의 설봉(雪峰) 수백 개를 발아래 내려다보는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젊은이들도 오르기 힘든 우아스카란을 그는 왜 올랐을까.
 
등산은 나와의 싸움
이계민(李啓民). 2001년 10월 환경관리공단 부장으로 은퇴, 2006년 10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페루 이카 주(州) EMAPICA(상하수도관리소) 파견 근무 중, 2007년 7월 2일 우아스카란 등정.
지난 8월 24일 그를 만난 곳은 산이 아닌 사막이었다. 그의 봉사활동 무대가 페루 남부 태평양 연안의 사막지대인 이카였기 때문이다. 귀를 덮은 반백의 긴 머리, 꾹 눌러쓴 야구 모자, 그리고 등산화. 프린세스라는 이름의 허름한 호텔 로비에서 맥주를 한잔 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 잉카 문명의 위대함을 증거하는 마추픽추 유적. 2. 페루 이카 주의 상하수도관리소 동료들과 함께한 이계민씨(맨 오른쪽). 3. 페루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우아스카란(6768m)의 만년설을 오르는 이계민씨.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를까. 심장이 멎을 듯 가쁜 호흡, 살을 에는 추위,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 안락한 집을 놔두고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더군다나 예순 나이를 훌쩍 넘긴 계민씨가 6768m의 산에 오른 이유는 뭘까.

“내가 끊임없이 산에 오르는 건 산을 정복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부단한 싸움입니다. 우아스카란에 오른 것도 나의 의지와 체력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의 건재함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지더군요.”

그의 우아스카란 등정은 페루에 오기 전부터 작정했던 일이었다. 지난 6월 28일 페루 봉사활동 10개월 만에 처음 얻은 휴가기간을 이용해 우아스카란으로 향했다.
“셰르파(등정 길잡이)와 요리사, 포터(짐꾼)를 대동한 5박6일의 일정이었습니다. 30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쳤지요. 29일 베이스캠프를 출발, 3900m와 5200m, 6000m고지에 캠프를 설치했습니다.”

7월 2일 드디어 정상에 섰다. 어땠을까.
“당시엔 기분 좋고 나쁘고를 느낄 경황이 없었어요. 정신이 멍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6000m 캠프에 내려오니 정신이 들더군요. 또 해냈구나. 희열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퇴직의 고통을 뛰어넘어
나이는 결국 숫자일 뿐이다. 페루에 오기 전 10여 년 동안 계민씨는 매년 마라톤대회 풀코스를 세 차례 이상 완주했다. 지난해에는 중국 다구냥(大姑娘·5333m)봉을 오르기도 했다. 체력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온 계민씨. 사회는 그만 물러나서 쉬라고 하고, 기운은 펄펄 넘치고…. 퇴직 후 찾아온 한가함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바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애프터서비스 센터도 운영해보고, 개인회사도 잠깐 다녀봤습니다. 하는 일마다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KOICA 해외봉사단 모집광고를 보게 됐어요. 페루 환경분야 봉사자를 모집하는 항목이 있더군요. ‘옳거니, 바로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평생 수질환경을 다루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계민씨는 이카 주의 상수도 시설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지진을 만났다. 지난 8월 15일 칠레 남부에서 발생한 규모 7.9의 강진으로 수질 실험기계 설치 공사를 중단해야 했다.

“지진 발생 당시 헬스클럽에서 저녁 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2층 체육관 건물이 흔들흔들 하더니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고, 운동기구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전깃불이 나가면서 깜깜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먼 타국 땅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페루에서 그가 직면해야 하는 어려움은 지진뿐만이 아니다. 나이 탓인지 좀체 늘지 않는 스페인어도 큰 골칫거리 중 하나다. 계민씨에게 스페인어는 우아스카란 봉우리보다 더 정복하기 어려운 산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 때문에 답답합니다. 그래도 꾸준히 합니다. 이젠 제법 늘었어요. 늘 만나는 직장 동료 이외에 동네 친구들도 생겼어요. 집에 초대도 하고 놀러도 가고.”
 
사막에서 ‘나’를 마주하다
이카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도시다. 계민씨는 지금 사막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셈이다. 40여 년을 함께한 아내, 20여 년간 품어서 키운 아들과 딸, 그리고 친숙했던 벗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만을 마주하고 있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서 새삼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다보고 있었다.

“개성 실향민입니다. 한국전쟁 중이던 다섯 살 때 홀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에 왔습니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면서 우리 삼남매를 키웠지요. 초등학교 시절 가난이 너무 지긋지긋해 돈을 벌어보겠다고 가출한 적도 있어요. 당시 강원도 철원 이발소에서 한 달여 동안 머리 감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신문팔이도 하고 벽돌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요. 다행히 형님 사업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서 어렵게 대학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요즘 이곳 페루 사람들을 보면서 옛날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미력이나마 힘껏 도와줘야죠.”

요즘 계민씨는 남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새록새록 느끼고 있다. 한국에서 편안하게 은퇴생활을 즐기려 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큰 보람이라고 했다. 계민씨는 60줄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었다.


박상주씨는 18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얘기 나누는 걸 즐긴 언론인으로 지금은 세계를 방랑 중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