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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취재일기

현실과 자존심 사이 … '평양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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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양시 4.25 문화회관 광장에 모인 인파를 구경하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군중들이 "와"하는 함성을 터뜨렸다.

어느새 눈앞에 '그'가 서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시계를 봤다. 10월 2일 오전 11시53분. 북측 안내원이 "기자 선생은 (김 위원장을 직접 본 것이) 영광인 줄 아시라요"라고 말했다.

광장 주변 수만 개의 눈들이 그의 몸짓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 눈길이 너무나 당연한 듯 김 위원장은 뒷짐도 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등 태연했다. 거대한 존재감이 광장에 번져갔다. 그러나 너무 멀었다. 기자단이 서 있는 곳에서 김 위원장까지의 거리는 100m는 돼 보였다.

북측 안내원들은 '근접' 완장을 찬 남측 기자들조차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 사이 남쪽 대통령과 7년 만의 상봉을 마친 김 위원장의 모습은 사라졌다. 등장에서 퇴장까지 정확히 19분간이었다. 짧았다. 첫날 첫 행사에서 봤으니 앞으로 기회가 또 있겠지….

오산이었다. 평양에 2박3일 머무르는 동안 눈앞에서 김 위원장을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000년의 김 위원장은 은둔을 벗고 한국 국민 앞에 당당히 섰다. 유머가 있었고, "동방예의지국"을 말했고, 뉴욕식 도시 개발과 워싱턴 식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환경을 보전하는 워싱턴 식이 더 낫다"는 철학도 내보였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김정일 신드롬이 생겨났다. 하지만 7년의 세월은 김 위원장을 다시 '클로즈업 금지 모드'로 변모시킨 듯했다.

북측은 행사 내내 남측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았다. 3일 오전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을 취재한 건 청와대 전속 영상팀이 유일했다. 그나마 북측 요원 두 사람이 붉은색 밧줄로 즉석 포토라인을 만들어 근접 촬영이 불가능했다. 그날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노 대통령 주최 만찬에는 취재 기기 반입을 허용하지 않아 사진기자가 사진기 없이 행사장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공개된 김 위원장의 발언은 2000년의 반의 반도 안 됐다.

이유를 묻자 북측 안내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았다. 남측 특별수행원들 사이에서 건강 문제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북측 김금복 기자동맹 부위원장은 "남측의 언론 보도는 편파적이며 반북 기사가 많이 있다"고 언론 탓을 하기도 했다.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번 회담에서 모든 행사와 일정을 담당한 건 김 위원장의 경호 조직인 호위총국이었다. 근접 취재 금지가 김 위원장의 뜻인 셈이다. 어쩌면 7년 전 신비주의를 벗은 데 대해 스스로 "너무 많이 알려졌다"고 느낀 때문인지 모른다. 너무 알려지면 대중에게 식상함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의 달라진 태도로 2007 남북 정상회담은 국빈방문보다 실무방문의 이미지가 부각됐다.

평양에서의 2박3일 동안 북한이 보여준 모습에도 복선이 깔려 있었다.

하나는 현실이었다. 쌍용자동차의 체어맨을 '준마'라는 이름으로 생산하는 평화자동차 공장 관계자는 "사실 내수는 별로 없다"고 털어놓았고, 김책공대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보고 있는 책은 누렇게 변색되고 낡았다. 사석에서 만난 북측 인사는 "남측은 정년이 언제냐?"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북한이 보여준 또 하나의 모습은 자존심이었다. 북측 안내원은 대동강가에 정박해있는 배를 가리키며 "저게 바로 푸에블로호(1968년 영해를 침범했다며 북한이 나포한 미국 정보함)다. 미국에서 수십억원을 준다고 하는데도 내주지 않겠다"고 자랑했다. 1일 먼저 출발한 선발대가 지날 때 어두웠던 평양의 밤거리는 하루 뒤 본대가 도착하자 가로등은 물론이고 네온까지 밝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어두웠다. 밤인데도 가로등조차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 남북 간의 거리가 어둠을 더 짙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앞이 환해졌다. 가로등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북한 내 개방의 상징, 개성 공단이었다!

박승희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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