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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시간이 멈춘 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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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얀마(옛 버마)와 북한은 여러 모로 닮은꼴이다. 두 나라는 독립 이후 60여 년간 폐쇄와 자주의 길을 달렸다. 미얀마 군부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운다면 북한은 ‘우리 식대로’ ‘자력갱생’을 외친다.

1962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네윈은 77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김 주석도 65년 해외 순방 도중 버마 수도 양곤에 중간 기착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83년 10월 9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한 아웅산 묘지 폭탄테러 사건 이후 네윈은 국교 단절 선언과 함께 북한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벌써 24년 전 얘기다.

하지만 두 나라의 가는 길은 비슷했다. 88년 네윈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연장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앞세워 권력 전면에 등장할 무렵이다. 두 나라는 또 미국·유럽 등 서방 세계의 경제제재를 받아 왔다. 미얀마는 민주화·인권탄압, 북한은 테러·핵·미사일 때문이다.

미얀마에선 비자·마스터 같은 신용카드가 통하지 않는다. 4성급 외국계 호텔에서도 달러·유로화로 숙박료를 내야 한다. 기업들은 방콕·싱가포르 은행에 계좌를 터놓고 ‘현찰 박치기’식으로 무역 대금을 결제한다. 공식 환율은 달러당 6.8차트(Kyat)이지만 암시세는 1000차트를 넘는다.

미얀마는 70년대 초까지 ‘아시아의 쌀 창고’ ‘황금의 나라’로 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1인당 소득 200달러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특권층은 벤츠·BMW 같은 외제 승용차를 몇 대씩 굴리지만 서민들은 한 끼에 100∼200원 하는 멀건 국물의 카욱쉐(닭고기와 카레 등을 넣은 쌀국수)로 끼니를 때운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어린이 세 명 중 한 명이 영양실조 상태다. 가히 ‘시간이 멈춘 땅’ ‘살아 있는 화석(Living Fossil)’이다.

꼭 4년 전 양곤에 나흘간 머문 적이 있다. 깜깜한 밤거리, 지도자 찬양 일색의 TV 뉴스, 가난과 공포에 찌들려 무표정한 사람들…. 북한의 지방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양곤에선 요즘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직접적인 계기는 쌀값과 기름값 폭등이었다. 하지만 군부는 무자비한 유혈 진압을 서슴지 않고 있다. 88년 8월 8일 있었던 이른바 ‘8888 시위’의 재판(再版)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미얀마 군부에 어떤 충고를 할까.

이양수 정치부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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