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더' 돌발 제안에 노 대통령 "상의하겠다" 하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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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아래는 좌석 배치도.[평양=연합뉴스]

3일 오후 2시45분 백화원 영빈관 2차 정상회담.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김정일 위원장이 돌발 제안을 했다.

▶김 위원장=기상이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중략) 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오찬을 시간 품을 들여서 편안하게 앉아서 허리띠를 풀어놓고 식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 오늘 회의를 내일로 하시고…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 대통령=나보다 더 센 권력이 두 군데가 있는데, 경호.의전 쪽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다소 놀란 듯한 표정의 노 대통령은 즉답을 피했다.)

▶김 위원장=대통령께서 그거 결심 못하십니까. 대통령이 결심하시면 되지 않나요…. (※김 위원장의 표정도 다소 굳어졌다.)

▶노 대통령=큰 것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회담은 이어졌다. 30여 분 지난 오후 2시33분 소식이 남측에 알려졌다. 윤승용 청와대 홍보수석이 청와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해 이 같은 제안을 전한 뒤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수석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평양에선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이 참모들과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어렵게 이뤄진 대화 기회인 만큼 하루 더 협상을 하면 더 많은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반론도 제기됐다. 제의가 정상회담의 글로벌 기준에 벗어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미 대통령의 2일 방북 환영장소가 '조국 통일 3대헌장 기념탑'에서 '4.25 문화회관' 광장으로 한 시간 전에 일방적으로 바뀐 다음이다. 환영식 장소에 김 위원장이 나타날지도 북측은 미리 알리지 않았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김 위원장의 돌연 제안은) 매너가 아니다"라고 했다. 임 전 원장은 "나도 2002년 4월 평양에 특사로 갔을 때 북측의 요청으로 일정을 늦췄다"며 "장관급 회담에서도 일정을 하루 연장하는 사례가 두세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위원장도 그럴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쪽에서의 갑론을박이 100여 분 정도 진행됐다. 그런데 갑자기 김 위원장이 물러났다. 회담장에서 김 위원장이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연장) 안 해도 되겠다. 남측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본래대로 합시다"라고 말했다. 긴박한 100분이었다.

우리 측으로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 책임자인 국방부 장관이 모두 평양에 체류하는 상황이 길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고, 이 같은 분위기가 북측에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연장 제안은 전형적인 북한의 회담 전술의 일환"이라고 지적한다. 이 같은 파격을 통해 상대방의 페이스를 흔들고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즉답을 안 한 것은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연장 소동을 통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인상을 북한에 심어주는 데 성공했고, 김 위원장은 자존심에 다소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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