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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고교때 쓴 일본어 산문 발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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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이 서울의 선린상업학교 전수과(專修科·야간)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어로 쓴 짧은 산문 한편이 발견됐다. 산문은 김수영이 전수과의 교우회지로 보이는 ‘등우(燈友)’ 창간호에 ‘어머니 대신에(母に代って)’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반쪽 분량의 글로, 김수영의 이름 앞에는 1학년 3반이라는 소속 학급이 표시돼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선린상업학교 시절 김수영의 일본어 글은 1938년에 발간된 ‘등우’ 특별호에 실린 산문 ‘우리 청년의 사명’과 ‘풍경’‘욱일(旭日)’이라는 제목의 시 등 세편이 전부였다. ‘어머니 대신에’는 물론 ‘풍경’ 등은 지난해 개정·출간된 『김수영 전집』(민음사)에는 빠진 것들이다.

'어머니는 아직 곤히 잠들어 계신다'로 시작하는 '어머니 대신에'는 전날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잠자리에 든 어머니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 부엌으로 간 김수영이 어머니의 밥을 특별히 부드럽게 짓고, 된장국을 준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는 연신 "장하다"며 김수영의 아침 준비를 칭찬하고, 어머니는 "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라며 눈물을 글썽인다.

저녁에 학교 가는 길에 아버지의 미소와 어머니의 눈물을 떠올린 김수영은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던 나를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간다'라고 끝맺고 있다.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을 펴냈던 시인 최하림씨는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수영에 대한 어머니 안형순씨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일제 말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김수영의 방은 따로 마련해 줄 정도였다.

반면 김수영은 어머니에 대한 정을 표시하는 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인색했다"고 말했다. 68년 발표한 산문 '반시론'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비친 몇구절이 전부일 정도라는 것이다.

최씨는 "때문에 '어머니 대신에'는 김수영이 어머니에 대한 속마음을 내비친 굉장히 드문 고백 중 하나"라고 말했다.

또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김수영의 생애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작품의 스타일보다는 내용을 중시한 김수영의 경향을 엿볼 수 있고, 이미 10대 중반부터 작품을 습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등우' 창간호는 고서적을 수집하는 둥지 갤러리 대표 문승묵씨가 최근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구입한 것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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