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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우리는 아직 '변방'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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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가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문화행렬에 거리를 온통 내준 샹젤리제의 20만 인파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또 수교 40주년을 맞아 프랑스를 찾은 중국인들 덕분에 에펠탑이 중국의 붉은 빛 전광(電光)으로 장식된, 다시는 재연되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을 보았다. 색감의 조화라면 세계 최고라는 프랑스인들이 그런 엉뚱한(?) 색으로 자신들의 상징물을 장식했다는 것 자체가 기이했다. 그러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중국의 넓은 시장에서 고작 14위 수출국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의 약진을 간절히 원했다. 공항 영접에 직접 나선 것은 물론, 에어버스 비행기 조립공장 방문이 일정에 들어갔고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를 연결하는 고속철에 프랑스산 TGV를 선보이는 문제가 논의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워싱턴 방문 때는 미국이 법석을 떨었다. 그는 국가원수 대접을 받았고 백악관의 명물인 링컨 침실까지 구경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독립 의지를 국민투표에 부쳐 확인하겠다는 대만에 대한 중국의 반발에 부시 정부가 손을 들어주었다. 프랑스나 미국이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을 일부러 자제한 채 중국을 극진하게 대접하듯 대국 간의 관계도 국익계산 앞에선 낯 간지러울 정도로 변한다.

바깥 여행 중에 마주치는 이런 행사들이 안으로만 파고드는 한국 내 어지러운 정황과 엇갈릴 때면 "우리는 아직 변방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개인소득 2만달러 시대를 구현한다든가,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등 구호를 앞세운 통치행태는 지난 반세기 익히 봐 왔던지라 그러려니 하자. 어쨌든 발상 자체는 진취적이니까. 외치고 또 외치며 자기암시를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야 무엇인들 못하랴. 하지만 지배세력의 교체를 위해 행정수도를 이전하겠다는 발상은 한마디로 변방적(邊方的) 생각이다. 또 어떤 연유에선가 마음 속 뿌리깊은 피해의식의 표출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아니면 용하다는 어느 역술가의 예언에 따른 결정이든지.

이런 얘기들과 씨름하다 보면 얼마 전 외교진용의 교체를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결로 몰아갔던 단순한 이들을 향해 한마디 하고 싶다가도 맥이 빠지고 만다. 애초 청와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미국식 모델을 따온 것이다. 미국도 대통령이 바뀌면 백악관 보좌관들과 국무부 간에 정책의 주도권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NSC와 외교부 간의 갈등이 우리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란 얘기다. 문제는 이라크 파병이든 북핵 해법이든, 아니면 주한미군 재배치든 양측의 입장차이를 지나치게 이념적 갈등으로 몰아가면서 출구 없는 자해(自害)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또한 지극히 변방적 사고의 발현이다. 입장의 상충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이 대국의 면모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라크 파병을 놓고 일본 정가에서도 자주(自主)외교 논란이 뜨거웠다. 하지만 동맹국인 미국의 필요성을 문제삼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실리(實利)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군사활동이 가능한 보통국가에 조금씩 다가가면서도 미국인 90%의 신뢰를 얻고 있는 게 일본식 국가운영이다. 다만 역사 해석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같은 역사를 공유했던 주변국과의 합의를 기피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변방국의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주'란 구호에 끌리지 않는 이가 있으랴마는 진정한 자주외교를 위해 변방적 사고부터 버릴 것을 새 외교진용에 주문한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