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술·순발력뛰어난 협상테이블「승부사」/만나본사람들이 말하는 김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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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누구의 협상력이 돋보일까.」
김일성북한주석은 공산주의식 협상기법의 노하우를 갖춘 화술이 능란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북한과 대화를 해본 우리측 「프로」들은『김의 협상 테이블 장악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평양의 주석궁(금수산 의사당)을 방문했던 남쪽 고위인사들의 경험을 통해 김일성의 화제 관리능력·표현력·임기응변·설득력·제스처·건강·복선 기법등 협상력 전반을 점검해본다.
▲화제 선점능력=김은 음식(쏘가리회·92년2월 정원식총리 면담)등 일상사에서부터 항일투쟁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화제거리를 갖고 있으며 상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사전에 숙지하여 대화를 선점한다.
그는 장세동전안기부장(85년10월 비밀방문)에게 『내집에 온것처럼 푸근하게』라고 했고,정총리에게는 『외교형식을 버리고 한식구처럼 화목하게』라고 「한식구론」으로 분위기를 잡아갔다.
그는 『고구려 유적을 일본사람들이 많이 도굴해갔다』(장부장 면담)면서 은근히 항일경력을 내세웠다.YS와 대좌에서 항일경력이 그의 화제선택 대상이 될것으로 점쳐지고있다.
김주석은 89년3월에 만난 황석영에게 소설 『장길산』을 다 읽었다고 말했는데,우리 당국자는 『아나운서들이 「장길산」을 녹음해 틀어준것으로 파악됐다』고 치밀한 준비성을 설명했다.
임동원전외교안보연구원장(90,92년면담)은 『정총리가 백두산도 가보자고 하니까 김주석은 이를 받아 백두산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북쪽에 좋은 산이 많다면서 관광사업으로 얘기를 연결하는「화제 관리력」을 보였다』고 했다.
▲표현력=간단명료한 어휘를 선택해 설득력을 높이려 한다.강영훈전총리(90년10월)는『김주석은 이를테면「총리회담에서 통일운동을 잘 해서 기쁘다」는 식의 쉬운 구어체를 사용한다』고 했다.『정중한 느낌을 줄 정도』(강영훈)로 경어를 사 용한다.
논리의 장황함에서 오는 지루함과 부담감 없이 곧바로 골자에 들어가며 이는 최근 카터전미대통령이 말한 『김은 솔직담백하며 합리적』이라는 인물평과 연결될수 있다고 임동원씨는 설명한다.
▲순발력=빨치산출신의 본능적인 생존술과 관련있다.대표적인 사례가 장세동부장과의 면담때 수재물자건.84년9월 홍수때 북한은 안받을 것으로 생각한 수재물자 공급 제의를 우리가 허를 찌르듯 수용하는 바람에 쌀·옷감을 모으느라 크게 애를 먹었다.
장부장은『수재물자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고 이런 낭패감을 떠보았는데,김은『전대통령 각하가 받은 용기에 감탄한다』고 치켜세우는 임기응변을 보였다.
화제를 반전시키는 이같은 순발력은 『핵문제로 궁지에 몰리자 정상회담을 제의하는「공세적 방어」협상술과 같은 것』이라고 한 관계자(익명요구)가 분석했다.
▲제스처=김은 주석궁 접견실 밖에 미리 나와있다가 포옹하며 사람을 맞는다.이런 제스처는 『고도의 친밀감 표시』(이병용민족통일연구원장)라고 분석된다.
그는 강·정총리와의 면담때 그런 제스처를 쓰지않고 악수만 했으나 문익환목사(89년3월)때는 포옹을 했다.
여기에 비해 김대통령은 악수할 때 상대방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끄는 독특한 스타일을 간혹 보였다.두사람의 첫 제스처부터 주목된다.
▲건강=82세인 김주석의 건강은 이상이 없다고 한다.다만 귀가 나쁘다.접견실의 탁자에 마이크가 달려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임동원씨는『연형묵북한총리가 서울방문 경험담을 꺼내니까 김은「뭐라고,뭐라고」하면서 큰 소리로 얘기하라는 시늉을 보였는데,한쪽 귀의 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은 우리쪽 인사들이『건강이 좋다』고 하면 『저는 낙천적입니다.그것이 건강을 지켜주지요』(장부장면담),『낙천주의가 건강비결』(강총리면담)이라고 답했다.조깅으로 단련된 YS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복선을 까는 기법=이런 노회한 기법의 사례로 강총리와 면담한 대목이 꼽히고 있다.김주석은『아무 결과가 없는 상봉(노태우대통령과)은 인민에게 실망을 줍니다.정상들이 순조롭게 만날수 있도록 많은 사업을 해달라』고 했다.
「좋은 결과 상봉」「많은 사업」등 적극적 이미지를 주는 상징적 발언은 의제선정을 꼬이게 하고 지연전술로 이어졌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지적한다.때문에『북쪽과는 추상적 합의는 위험하며 정밀함이 필요하다』(이병용·90년10월 면담)는 것 이다.
▲이벤트 정치=이번에 카터와 대동강 요트회담을 하는 것처럼 이벤트를 생산하는데도 능하다.
이런 것과 대비할 때 김대통령은 옐친러시아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북한에 대한 무기부품 공급중단이라는 합의를 끌어낸 것처럼 돌파력,꼬인 이슈들을「단선화」하는 능력들이 평가되어 왔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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