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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빈 화분에 깃들 풀씨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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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몇 해 전 언니가 이사를 하면서 흙만 담긴 토분 하나를 줬다. 동그랗고 납작한 게 뭐라도 심으면 근사할 것 같아 집으로 가져왔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여기서 싹이 나." 틈만 나면 물뿌리개를 들고 다니는 아들 영준이가 가리키는 곳에 정말 거짓말처럼 싹이 나고 있었다.

"내가 이걸 키운 거야." 영준이는 조물주가 부럽지 않은 당당한 태도다. 자기가 꾸준히 물을 줬더니 뭔가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딸 경민이가 동생 말에 반기를 들었다. "야,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데 물만 준다고 싹이 나니?" 둘이서 옥신각신하더니 경민이가 결론을 내렸다.

"씨앗이 바람을 타고 우리 집으로 날아들었어. 마침 빈 화분이 있어서 그곳에 내려 앉았는데 영준이가 부지런히 물을 준 덕분에 싹이 난 거야."

싹이 자라자 아이들은 식물도감을 뒤져서 그게 '쇠비름'이라는 걸 알아냈다. 늦가을에 쇠비름이 씨앗만 남기고 죽을 때까지 아이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한해살이풀의 생을 안타까워한 아이들은 다음 해를 기다렸다.

그때 시작된 우리 집 '빈 화분 가꾸기'는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올해는 또 어떤 풀씨가 날아올까. 아이들은 기다린다.

가끔 새로운 싹이 나면 그때부터 온 가족의 관심은 그곳으로 집중된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새 생명이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란. 또 다른 빈 화분에 뿌리를 내린 괭이밥은 저녁이면 잎을 오므리고 잠이 드는데 정말 귀엽고 앙증맞다.

원래 그 화분의 주인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빈 화분 가꾸기는 우리 가족에게 '기다리는 즐거움'과 더불어 '함께 사는 기쁨'까지 가져다 주었다.

최원형 16기 주부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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