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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1.4후퇴때 마지막 피난열차 몰았던 신원식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철도인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레일이 있고,기다리는 승객이 있는한 철마를 멈추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해야 합니다.』 89년 40년의 철도인생을 마감한뒤 이제는 다섯 손주의 할아버지이자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전직기관사 辛源植씨(64.서울용산구서부이촌동)는 사상 초유의 철도.지하철 연쇄파업으로 시민의 발이 꽁꽁 묶여버린 요즘 그누구보다 가슴이 답 답하다.
신문을 펼칠 때마다 분신과 다름없던 기관차들이 주인을 잃은채차고에 힘없이 처박혀 있는 모습과 한솥밥을 나눠먹던 후배기관사들이 초췌한 얼굴로 농성장에서 맥없는 손짓을 해대고 있는 사진을 접해야 하는 까닭이다.
『한달에 절반 이상 집에 못들어가면서도 묵묵히 철길을 달리는후배들이 어떻게 해서 열차에서 뛰쳐나와 하루아침에 시민들에게 지탄받는 집단이기주의자들로 손가락질 받게 됐는지 그저 안타까울뿐입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던「열차가 승객을 외면하고 서버린 사태」에 대한 辛씨의 안타까움은 남다르다.
「끝내 못태운 승객」들로 인해 44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에멍울처럼 맺힌 恨을 후배들을 일일이 붙잡고 설명해줄 수 없기 때문. 51년 1.4후퇴 당일 용산역에 남아 있는 수많은 피난민들을 애써 뿌리치고 오전4시 부산행 마지막 피난열차를 끌고 떠나야했던「비극」이 바로 그것.
『몇리 밖에서 우박 쏟아지듯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끝내 열차를타지 못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처절하게 울부짖던 한 어머니와 품에 안긴 꼬마아이의 슬픈 눈망울을 단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당시 한강철교를 뒤로 하고 서울을 빠져나오다 화차위에 올라탄 피난민들이 다리 난간에 부딪쳐 목숨을 잃은 기억도 辛씨에겐 애써 감추고 싶은 아픈 사연중 하나.
이런 이유로 辛씨는 기차를 운행할 때마다 승객들에겐 큰 빚을지고 있는 죄책감을 항상 지녀야 했다.때문에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밤마다 귀향꿈으로 잠을 설치는 실향민들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태우고 통일된 북녘땅을 달리고 싶지만 지금 같아선 그같은희망도 막연하다.
지구를 15바퀴나 돈 거리인 69만㎞를 단 한번의 사고도 없이 달려온 老기관사의「자랑스런 이력」도 최근 열차파업이 시작되면서 남앞에 떳떳이『기관사출신』이란 말을 꺼낼수 없게돼 오히려짐이 돼버렸다.
『무엇보다 안타까운건 「땅위의 파일럿」으로까지 불려왔던 긍지가 조금씩 퇴색돼가고 있는데도 선배로서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辛씨가 철도에 발을 들여놓은 1950년 전후만해도 기관사는 최고 인기직업중 하나였다.
그러나 석탄을 때고 달리던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그리고 시속4백㎞가 넘는 고속열차시대로 바뀌는등 외형적으로 철도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도종사원들에 대한 처우는 기대에 못미쳐왔다는 辛씨의 지적이다.
辛씨는『88년 7월 부분파업당시 국민들의 매서운 질책을 받고도 다시 기관사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된 이유에 대해 정부나 국민들이 한번쯤은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할 부문』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면서도『정부와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길은 무엇보다하루빨리 현업에 복귀해 다시 국민의 발로 뛰어주는 길뿐』이라고호소한다.
『충직한 기관차를 다루는 철마인들은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순수합니다.요며칠 잠깐동안의「외도」를 씻어버리고 우리 후배들이 일선으로 복귀해 힘찬 기적을 울리며 열차를 모는 모습을 국민들은 곧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辛씨의 작고도 간절 한 바람이다. 〈表載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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