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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강태공·신종 바둑인간' 이창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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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군웅할거의 바둑계를 천하통일한 '19로의 마술사' '속력행마의 신봉자' 조훈현은 각 기전에서 신기록 행진을 거듭하며 이후 20여년간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90년대를 맞으며 조훈현 바둑제국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무수독학의 야생마' 서봉수, '소년도인' 이창호, '떠오른 별' 유창혁의 협공으로 바둑계는 '4인방 시대'라는 이름으로 새시대의 막을 열게 된 것이다.

이들 중 조훈현의 최고 난적은 그가 7년간 가르쳐왔던 15세의 제자 이창호였다. 중학교 3학년의 천재소년은 90년 오늘(2월2일)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스승 조훈현을 상대로 종합전적 3승2패로 '최고위'타이틀을 차지한다.

83년 8세때 바둑에 입문, 84년 曺9단의 내제자로 본격적인 바둑수업에 들어가 86년 11세때 프로 데뷔, 89년 84승27패로 최다 대국·승률2위(75.7%)를 기록한 이창호는 이날의 경기를 통해 '최강자 이창호 시대'를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해 8월 국내프로기전사상 처음으로 32연승을 기록, 77년 조훈현의 31연승기록을 13년만에 경신하더니, 10월 15년동안 '曺國手'라 불리던 스승 조훈현의 30년 공부를 허물고 3대0 스트레이트로 국수(國手)타이틀을 빼앗기에 이르른다.

엄혹한 수업기와 좌절, 가혹한 시련을 겪고서야 비로소 한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바둑계에서 이창호의 등장은 실로 예외적인 것이었다. 전문가들조차 원숙한 나이의 성장과 비례하는 특수한 정신세계가 바둑이라는 말에 의문을 품었고, 전생의 선업 또는 다생겁내로 쌓아온 공덕의 결과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고도 했다.

'돌부처' '강태공' '우주에서 온 소년' '전생의 고수'라는 숱한 별명처럼 이창호는 표정없는 얼굴과 상대를 질식시킬 듯한 침묵, 진부할 정도로 상식적인 바둑내용으로 유명하다. 당시 '무수독학의 야생마' 서봉수는 그의 컴퓨터에 버금갈 정도로 정확한 끝내기를 두고 "완벽한 바둑꾼이 나타났다. 21세기의 신종 바둑인간으로 보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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