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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일본문화다>3.빛바랜 구로사와 명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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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90년3월 아카데미상 시상식장.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커스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단상에 등장했다. 이 두 사람이 발표할 상은 특별공로상.영화사에 남을만한 족적을 남긴이들에게만 수여되는 이 상은 찰리 채플린이나 앨프리드 히치콕등 거장들이 과거 수상한 바있다.봉투를 뜯은 루커스는『구로사와 아키라』라고 수상자 이름을 호명했다.
동양인으로선 상당히 큰 체구를 자랑하는 구로사와가 등장하자 장내의 관객들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이 老대가를 맞이했다.이날시상자로 스필버그와 루커스가 선정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이들은구로사와를 자신의 영화스승으로 모시고(?)있기 때문이다.루커스가 자신의 출세작『스타워스』에서 구로사와의『은신처의 세 악인』주요장면 및 인물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스필버그도 구로사와의 영화『꿈』에서 직접 제작책임을 맡을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
미국 최고의 감독들이 구로사와에게 보여주는 경외감은 이 늙은일본감독이 세계영화계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2차대전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는 일본영화,나아가 일본문화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위를 누 렸다.
51년『라쇼몽』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일본영화의 높은 수준을 세계에 알린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남아있는 것이다.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가 『일본에는 두명의 천황이 있다』면서 그를 천황에 비견한것은 다소 호들갑이 섞이긴 했지만 그가 누리고 있는 명성의 일단을 잘 전해주고 있다.
그는 선배격인 미조구치 겐지.오즈 야스지로보다 먼저 해외에서엄청난 명성을 얻었다.미국영화의 압도적 영향아래 영화를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일본감독과 다를바 없음에도 그가 일찍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영화가 무엇보다도 「 영화적」이었기때문이다.다시 말하면 일본문화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영화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 구조가 선악의 분명한 대비로 이루어져 있어 이해하기 쉬운데다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리드미컬한 편집은 미국영화와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영화적 쾌감을 서구관객들에게 주었던 것이다.그의 명성을 부동의 것으로 만든 작품은 54 년에 발표한『7인의 사무라이』다.3시간20분에 이르는 이 대작은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농민들을 괴롭히는 산적들을 무찌른다는 내용으로 장대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으로 인해 일본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힐 뿐아니라 영화사상 올 타임 베스트10에도 드는작품이다.이 작품을 위시해『요짐보』『츠바키 산주로』등 구로사와의 사무라이 영화에는 존 포드의 서부극의 영향이 짙게 깔려있다.문명과 야만을 철저하게 대비시키면서 문명의 수호자로서 사무라이를 내세운 것은 확실 히 전형적인 서부극의 틀과 전혀 다를바없다.그러나 그의 작품이 서구감독들에 의해 여러 번 리메이크되면서도 어느 것도 원작에 못미치는 수준으로 그치고 만 것은 새삼 그의 위대성을 입증해준다.『7인의 사무라이』가 존 스터지스에 의해『 황야의 7인』으로,『요짐보』가 세르지오 레오네에 의해『황야의 무법자』로 각각 만들어졌지만 원작에 비해 여러 면에서 손색이 많은 작품이 되고 말았다.
90년대 들어 그는 거의 1년에 한편꼴로 신작을 만들어내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80세가 넘은 나이에도 『꿈』(90년),『8월의 광시곡』(91년),『마다다요』(93년)등을 계속 발표해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영 화를 감독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것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열정은 가위 경이적으로 보인다.영화사상 최연장 감독이 아니겠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다.그러나 그의 신작들은 불행히도 일본국내에서 별로 평 판이 좋지않은 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혹평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85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전국시대로 옮겨 만든 『난(亂)』으로 어느 정도 자신의 영화인생을 정리한 것으로 보였던 구로사와가 5년만에 신작『꿈』을 만들면서부터 그에 대한 비난이 나오기 시작했다.자신의 꿈을 8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만든 이 옴니버스영화는 아름다운 화면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기도취적인영화라는 평을 받았다.무엇보다 긴장감 없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의나열에 그쳐 버려 구로사와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던져주었다.
***『8월의 광시곡』 물의도 다음 작품인『8월의 광시곡』에서 그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으로남편을 잃어버린 어느 할머니가 당시의 공포를 잊지못한채 발작을일으킨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리처드 기어가 일본계 미국인으로 등장,일본인들에 게 미국의 원폭투하를 사과하는 장면이 국제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라는 점은 외면한채 피해자로서의 모습만 일방적으로 부각시킨 이 영화는 구로사와가 얼마나 위험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느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구로사와 자신은『전쟁 그 자체의 파괴성을 보여주려 한것이지 결코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인하려한 것은 아니다』고 변명했지만 비평가들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지난해 발표한『마다다요』도왕년의 명성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유명한수필가인 우치다 하켄(內田 百閒)을 모델로 한 이 영화는 2차대전을 배경으로 은퇴한 고교교사가 제자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나눈다는 내용이다.이 영화에서도 전통적인 일본적 사제관계에 대한구로사와의 집착이 은근히 드러나 고 있다.
일본의 소장파 비평가인 우메모토 요이치(梅本洋一)는 구로사와를 『근본적으로 액션감독』이라고 말한다.『7인의 사무라이』나 『요짐보』같은 영화에서 보다시피 짜임새있는 각본을 토대로 박진감있는 액션을 묘사할 때 구로사와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우메모토의 견해다.최근의 구로사와 영화가 형편없는 이유는쓸데없이 메시지를 앞세우려 한데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젊은층에 공감 못줘 젊은 세대들에게는 별로 공감을 받기도 어려운 진부한 휴머니즘을 내세우면서 왕년의 구로사와 영화가자랑하던 박진감도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일본의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서 구로사와는 거의 「노망든 늙은이」로 취급받는 분위기였다.『차 라리 영화를 만들지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일본영화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극언하는 사람까지 있을 지경이다.원로라면 거의 무조건적인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이 일본문화의 특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대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비판은 상당히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최근들어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스타감독이 전무하다시피한 일본영화계로선 구로사와에게 기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같아 보이기도 했다.비록 노쇠했다곤 하지만 그의 신작은 역시다른 감독의 그것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주목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로사와가 84세라는 나이로 메가폰을 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오늘의 일본영화가 얼마나 침체해 있는가를 역으로입증해주는 것이 아닐까.
〈林載喆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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