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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만 "글로벌 유동성 위기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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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트라우마(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병이 있다. 신체적 손상 또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후 나타나는 정신장애가 1개월 이상 지속되는 병이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은 지속된 통화 긴축,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미국발 신용경색 등 잇따른 악재로 말 그대로 ‘트라우마’에 빠진 것 같다. 과거 유동성 급감으로 나타났던 금융시장 및 실물경기 침체라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유동성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2001년 이후 본격적으로 도래한 저금리 환경, 중국 등 신흥 국가들의 수출 호조 및 경상수지 흑자 확대, 개도국의 외환보유액 급증과 재투자(recycling), IT 버블 붕괴 이후의 과소 투자 및 과잉저축, 원유 및 원자재 수출국의 부(富) 축적 등에 기인한다.

더불어 금융혁신과 증권화를 통한 파생상품이나 구조화된 상품도 최근 전체 유동성 증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유동성 문제에서 정책 당국이나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적정 수준을 초과하는 과잉 유동성이다. 일반적으로 과잉 유동성은 유동성 증가 속도가 명목성장률에 비해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으로 정의되곤 한다.

경험적으로 과잉 유동성은 시차를 두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했고, 이내 경기 주기에 변화를 일으키는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해 왔다. 글로벌 통화 당국이 유동성 증가 속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최근 들어 발생한 엔캐리 청산 및 미국발 서브프라임 부실 문제가 글로벌 유동성 급감으로 이어지고, 글로벌 시장, 특히 개도국 금융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나리오는 현실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배경에 근거한다.

먼저 글로벌 경제는 고성장 추세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미국과 유로 양대 축 중심의 글로벌 경제 구도는 2003년 이후 아시아 및 동유럽, 중동, 중남미 등 여타 개도국 성장세가 확대되며, 성장 축이 다변화됐다. 글로벌 유동성의 급감을 가정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경제의 침체를 가정해야지만, 현 글로벌 경제의 성장 추세를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둘째는 글로벌 고성장 및 유동성 확대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글로벌 물가가 수년째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점이다. 중국과 인도의 등장으로 과거와 달리 유동성과 인플레이션의 상관관계가 약화된 것이다.

셋째는 글로벌 경제에서 여전히 과소 투자와 과잉 저축의 틀이 유지되고 있는 점이다. 이는 글로벌 금리 하락 및 유동성 창출로 이어져 주식 등 위험자산의 가격을 지지할 요인이다. 아시아 및 원유 수출국 등에 축적된 과잉 저축을 축소시킬 정도의 고정투자 확대가 유발되지 않는 한 급속한 유동성 위축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과거 경험에 의지해 글로벌 경기침체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성장 잠재력이 높은 국가, 그리고 기업에 대한 장기 분산투자 마인드가 필요할 것이다.

지속되는 양적 팽창과 더불어 점진적 경제 체질 개선이 가시화되고 있는 아시아 지역이 중기 글로벌 자산배분 관점에서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투자 대상 지역으로 보인다. 요컨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장기 분산투자가 작금의 유동성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대안 중 하나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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