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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이 죄인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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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추석에 집에 가느니 차라리 출장을 가거나 야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은 언제?” “저금은 얼마나?” 등의 질문에 시달리는 과년한 싱글들이다.
유독 길다는 올해 추석 연휴를 견디고 살아남는 법. 나이는 많고 연봉은 적고 저금은 없는 홀몸의 본보기라 할 싱글이 마음먹고 준비한 추석 대비 완전무장을 소개한다.

누군가는 경고해 주었어야 했다. 이렇게 추석 연휴가 긴 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온갖 여행상품과 비행기표가 일찌감치 동난다는 것을. 어머니 이마에 수시로 등장할 ‘내 천(川)’자와 친척들의 동정 어린 한숨으로부터 독신자가 도망갈 유일한 곳, 그러니까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로 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 봉쇄되었다. 이제 남은 유일한 선택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이 난국을 돌파하는 것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이 추석인지라 콩나물 자라듯 커가는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줄 필요는 없다는 정도다.
연휴는 길고, 친척은 많다. 이럴 때일수록 현명하고 철저한 준비만이 독신자의 생존을 보장한다. 정면돌파를 시도했다가 애인 유무는 물론이고 연봉 액수, 적금 액수에 장래 고민까지 털어놓아야 하는 우울한 명절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망가지 않고도 도망갈 수 있는 방법, 어디 없을까?

‘장동건도 하고 논다’는 그것
장동건도 하고 논다던 광고의 주인공, 닌텐도 DS는 꽤 유용한 아이템이다. 친척 어르신이 오락기 아니냐고, 넌 왜 그 나이가 되도록 오락에 빠져 있느냐고, 혹시 네가 말로만 듣던 오타쿠냐고 묻거든 대답하라. 장동건도 한다고. 이것은 게임기가 아니라 지능 계발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자. ‘슈퍼마리오64DS’는 당신이 독신인가 아닌가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던 아득한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며 시간을 빠른 속도로 죽여준다. 명절의 특성상 집안에서 인적 드문 장소를 찾을 수 없긴 하지만 전자사전 크기의 닌텐도 DS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실 구석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즐거움을 보장한다. 다만, 쓸데없이 조카들에게 자랑하지 말 것을 권한다. 당신의 닌텐도 DS에 매혹된 조카들이 기기를 마구 다루다가 고장 내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조카들이 부모에게 “나도 이거 사줘!”를 외치는 순간에 있다. 자칫하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조카들한테 오락이나 가르치는 철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수가 있다.

친척들이 목소리 높여 당신의 장래를 걱정하는 소리가 듣기 싫다면 MP3플레이어를 휴대할 것을 권한다. 아이리버 미키는 작은 미키마우스 머리 모양이기 때문에 목에 걸고 있으면 어르신들이 장신구 정도로 생각하고 방심할 가능성이 큰 물건이다. 평소 집 안에서 하지 않았다 해도 설거지에 과감하게 도전할 것. 친척들과 동떨어져 설거지를 하며 아이리버 미키에 담아 온 음악을 들으면 근심과 걱정은 잠시나마 자취를 감춘다. 블랙·은색·흰색·파란색·핑크의 다섯 색상이 있으니 옷 색깔에 잘 맞추면 정말 목걸이처럼 보인다.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기 좋은 또 하나의 장소는 어른들이 ‘그림 맞추기 놀이’를 하는 방. 일단 돈 놓고 돈 먹는 ‘그림 맞추기 놀이’에 빠진 사람은 당신이 독신이건 말건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놀이에 한창인 사람 뒤에서 절대 그림을 주시하지 말 것. 자칫하면 게임에 빠져들어 당신도 모르게 몇 마디 하다가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이어폰을 꽂고 있을 때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진다는 점을 특히 주의할 것. 이발할 일이 있어도 추석까지 참는다면 이어폰을 꽂은 귀 부분을 효율적으로 가릴 수 있다.

재미, 재미, 재미있는 책을 찾아서
만일 당신이 틀어박힐 방이 있다면 독서 또한 좋은 탈출구가 된다. 연휴가 길다는 점을 감안해 그동안 벼르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분량이 많은 소설들에 도전한다. 책을 고를 때는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 셋째도 재미를 기준으로 하자. 우아하고 감상적인 독신자로 보이겠다는 생각에 도스토옙스키 같은 거성을 선택했다간,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수다의 지옥으로 탈출 아닌 탈출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평소 독서보다는 쇼핑을 좋아한다면 『쇼퍼홀릭』 시리즈를 읽을 것. 쇼핑으로 패가망신할 위기에서 왕자님을 만나는 현대판 신데렐라의 이야기인데 어려서 로맨스의 은총을 받고 자라난 만년 소녀들에게는 매혹적인 해피엔딩을 안긴다. 판타지 소설은 대개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시간 보내기에 유리하다. 나폴레옹 전쟁이 절정이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용들이 격렬한 공중전을 펼치는 이야기 『테메레르』는 현재 2권까지 나왔는데,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감독한 피터 잭슨이 영화화한다니 나중에 어디 가서 아는 척하기도 딱 좋다. 판타지를 즐겨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열심히 책장을 넘기게 되는 책이다.

웅장하고 진지한 건 딱 질색이고 그냥 웃고 싶다면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읽어라. 개콘보다 웃기는데, 틈틈이 생각할 거리도 많은 책이다. 386세대인데 독신이라면, 즉 진정 ‘과년한’ 독신이라면, 이 책을 여러모로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명절 후유증 극복은 운동과 다이어트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혼기가 꽉 차고 넘친 독신자가 명절날 친척들 틈바구니에서 맨 정신으로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얘기를 다 듣고 있다가는 명절이 끝나고도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면벽수행에 빠져드는 우울증에 빠져들 수도 있다. 친척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던지는 ‘따뜻한 충고’가 독신자들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

추석이 끝나거든 오랫동안 미루던 운동에 도전하는 것도 명절 트라우마 극복에 도움이 된다. ‘나이키와 아이팟 스포츠 키트’는 무선 센서를 나이키+ 운동화의 안창 밑에 있는 포켓에 넣은 뒤 리시버를 아이팟 나노의 커넥터에 꽂으면 운동량을 이어폰으로 중계받을 수 있는, 이른바 최첨단 만보기다. 운동이 끝난 뒤 아이팟을 아이튠 프로그램에 연결하면 매일매일의 운동량 변화도 확인할 수 있다. 독신인 것도 서럽지만 애인이 없는 건 더 서러운 싱글 중의 싱글이라면, 추석 즈음의 선선한 날씨를 계기로 다이어트를 하자. 시름을 잊는 데는 운동만 한 게 없고, 애인 만드는 데 다이어트만 한 게 없으니.

그런데 이 많은 걸 갖추려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외롭고 서러운 독신 외길인생에 유일한 벗은 ‘지름신’ 아니던가. ‘지름신’은 명절 우울증을 따뜻한 손길로 치유해 주시나니…. 억울하면 애인한테 사달라고 하는 거다! 아, 애인이 없는 게 문제의 출발점이었던가.


이다혜씨는 영화·만화·일본 소설 등 대중문화 전반에 예리한 촉수를 열어두고 있는 자유기고가로 아직 결혼에 뜻이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싱글입니다

이다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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