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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냉키의 굴욕 … 시장엔 보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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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뉴스분석 벤 버냉키 의장에겐 '굴욕'의 하루였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다는 미 FRB 의장이지만 시장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가 이끄는 FRB가 정책금리를 0.5%포인트 내린 것은 시장의 요구에 굴복한 것으로 풀이된다. 관례대로 0.25%포인트만 낮출 수도 있었지만, 시장은 '안정'을 위해 줄곧 큰 폭 인하를 요구해 왔다. 정부와 FRB의 강력한 의지를 보이라는 주문이었다. 한 달여간 버티던 버냉키도 계속되는 신용 경색과 시장 불안에는 견디지 못한 셈이다.

지난달 불거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지만 당시 버냉키는 금리를 내리지 않고 버텼다. 금리를 내리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훗날 더 큰 대가를 물게 된다는 게 이유였다. 무엇보다 싼 돈을 빌려 돈 장사를 하다 시장을 망가뜨린 고객과 금융회사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신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빌려줄 때 적용하는 할인율을 낮춰 돈 줄을 죄었다. 그런 그를 두고 시장은 FRB가 긴급회의라도 열어 당장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시장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버냉키의 굴욕도 예고됐다. 그가 금리를 내릴 것이란 사실은 말이 조금씩 바뀌는 것에서 감지됐다. 6월까지만 해도 그는 단호했다. "서브프라임 문제가 미국 경제 전체나 금융시장으로 확산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함도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다. 급기야 지난달 31일엔 "부정적인 영향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물러섰다. 결국 버냉키는 이날 금리를 내렸고, 인하 폭도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정착시킨 '그린스펀의 걸음마(0.25%포인트)'보다 컸다. 그만큼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따른 충격이 컸다는 의미다.

버냉키의 굴욕은 시장에선 일단 '보약'이 됐다. 미국 다우지수는 금리인상 조치 후 두 시간 만에 2%가량 급등했으며, 19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올랐다. 서브프라임에 전전긍긍하던 금융회사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미국 NBC방송에 출연한 애틀랜틱 센트럴 뱅커스 뱅크의 존 에번스 회장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이라며 버냉키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비난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유로퍼시픽 캐피털의 한 애널리스트는 "금리인하는 무책임한 조치"라며 "버냉키가 미국 경제를 '싼 돈(Cheap Money)'에 중독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금리인하가 당장은 경기가 가라앉는 속도를 늦출진 몰라도 근본 치료는 되지 않는 만큼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에 두고두고 큰 짐이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금리인하로 당장 미국 경기가 회복세를 탈 수 있겠지만 대신 미국의 적자 폭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국채 등을 팔아 적자를 메우는 지금까지의 악순환이 심화되고, 결국 이는 세계 경제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위협도 그만큼 커지게 됐다.

한국금융연구원 하준경 연구원은 "서브프라임 부실 문제는 1~2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FRB가 돈놀이에 급급했던 이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현.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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