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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족 영어로 희희낙락/강남 오렌지거리 밤품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로데오거리서 우리말 쓰면 촌스럽다”/3명 한자리 술값이 70만원이나/골목 「인간시장」서 파트너 흥정
박한상군(23) 사건은 「특수한」 예외다. 그러나 속칭 「오렌지족」들이 어울리는 거리의 가치관전도·향락·황금만능 분위기 속에서는 얼마든지 「또다른 박군」이 양산될 수 있음을 보였다.
27일 오후 11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N호텔 지하 C나이트클럽 입구. 박군 사건의 충격속에도 밤풍경은 여전하다.
남자는 한결같이 짧은 무스머리에 반바지 차림,여자는 아예 등판이 없는 면티에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20대 초반 젊은이들 30여명이 1시간 가까이 출입문 입구에서 서성이며 입장을 기다린다.
호텔주차장엔 이들이 타고온 그랜저·쏘나타·프린스 등 중형승용차로 일찌감치 만원사례.
귀청을 찢을듯한 레게음악에 맞춰 흔들흘들 거리며 「아무 근심걱정 없는」 표정으로 다가올 쾌락을 기다리던 이들은 『자리가 나왔다』는 웨이터의 전갈에 환호를 하며 앞에 있던 몇명이 나이트클럽안으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국산양주 한병과 과일안주를 주는 이 나이트의 기본요금은 13만원이지만 대부분은 한병에 30만∼50만원씩하는 로열살루트·조니워커블루 등을 시킨다. 『야 모처럼 기분한번 내자. 우리 아버지 졸부아니냐. 돈쓸 시간이 없어 문제지』 『야 여기 애들은 한물 갔다. 화양리에 가 큰거 한장만 뿌리면 17∼18세짜리 삼삼한 애들이 줄줄 쫓아오니까 자리 옮기자.』
70만원의 술값을 호기있게 지불한 청년 3명은 자정이 넘자 아직도 흐느적거리는 다른 50여명을 뒤로한채 만취상태에서 흰색 그랜저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물쓰듯 돈쓴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여기선 돈만 있으면 황제죠. 외제차에 핸드폰들고 영어나 불어를 해대면 여자들이 사죽을 못씁니다. 부모에 대한 욕들도 예사로 해대는데 어떤땐 끔찍해요.』
웨이터 A씨는 박군 사건후 손님이 줄었느냐는 질문에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에앞서 오후 10시30분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B커피숍.
『How do you like my brand new hairstyle』 『It goes pretty well with your makeup and white dress』
10대중반의 남녀학생 10여명이 머리모양이 화장과 드레스에 잘 어울린다는 말을 영어로 해대고 있었다.
『한국말을 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 한국인이에요』라며 낄낄거린다. 성남의 모영어학교 2년생들이라고 당당히 밝힌 이들은 미국에 이민갔다 부모와 함께 돌아왔지만 적응을 못해 영어학교에 다닌다는 것이다.
아예 속살을 다 드러낸 속칭 「톱리스」를 입고 대답하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 오른손엔 말보로담배가 타고 있다.
『저런애들 보면 솔직히 부러워요. 요즘은 국내에서 행세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놀다와야 한다니까. 얼마나 자유로워요.』
한참 동생뻘인 이들을 힐끔거리던 전문대생 서모군(22)은 당장 미국유학 신청이라도 해야겠다는 표정이다.
28일 오전 3시30분,방배동 카페골목길엔 때아닌 승용차와 인파로 흥청거리기 시작한다. 경찰의 단속을 피해 위장을 한채 심야영업을 하는 술집에서 「마실 만큼」 마시고 파트너를 찾지못한 오렌지족들이 「인간시장」으로 몰려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야 너 괜찮은데 난 키가 1백80이고 돈도 많아.』 『어디로 갈건데.』 『광명이 요새 좋다더라.』
로얄프린스를 몰고나온 20대초반의 청년과 10대 후반쯤으로나 보이는 여자사이의 대화는 단 세마디였다. 여자는 『오케이』하는 말과 함께 승용차에 올라탔고 차는 쏜살같이 거리를 빠져나갔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 유일한 가치고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며 부모는 그 돈을 대주는 사람으로만 여기는 오렌지족들. 박군 사건은 어쩌면 일찌감치 예정돼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김동호·김홍균·표재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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