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게임 룰 철저히 지켜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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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중인 공기업의 민영화가 이번 한비의 경우처럼 매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채 말썽을 빚고 있다. 정부의 준비소홀도 문제고 기업들이 경쟁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진 것이 없다. 기업들의 진흙탕 싸움에 정부가 자율경쟁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명분 때문에 깔끔한 조정을 못하자 과연 이런 식의 민영화 추진이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까지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국제화와 효율화라는 대세를 너무 의식해 어떻게 하든 민영화를 이루었다는 가시적인 업적에 신경쓰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 결과로 민영화를 추진하는 방법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준비,그리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공정거래정책 및 경제력 집중 완화정책과의 종합적인 연계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정부가 많은 공기업을 종합적으로 다룰 기본법의 제정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실책이다. 그 결과 매번 사안별로 민영화 방법을 원칙없이 바꾸다보니 모양새가 상당히 어색하다.
공기업의 민영화가 기업들에는 재계 판도를 바꿀 만큼 거대한 이해가 걸려 있다는 점에서 당초부터 과당경쟁이 예상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따라서 다소 잡음이 있다고 해서 이미 발표된 민영화 스케줄을 취소해선 안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하고 준비를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선거철이 다가온다는 사실 때문에 지나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은 경쟁의 게임 룰을 분명히 정하는 것이다. 일단 일관성있는 게임 룰을 정했으면 예외없이 기업들에 준수하도록 요구하고,룰을 어기고 부당하게 떼를 쓸 때는 응분의 제재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정부가 줏대없이,이른바 국민정서라는 정체가 분명치 않은 핑계로 게임 룰을 정한 것까지 회피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어느 나라에서 중요한 기업경쟁정책을 원칙없이 기업들이 알아서 타협해 결정하라고 방지하고 있는가.
정부가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는 지난 시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불필요하게 경쟁과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나 그 경쟁의 틀은 정부가 짜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특정 공기업의 시장구조와 인수희망기업의 능력 등 보이지 않게 정부가 세심한 분석을 하고 이를 토대로 기업들이 근거없이 떼를 쓸 여지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기업들이 위장 계열사를 동원한다는 의혹을 없애려면 공기업 민영화에 관한한 공정거래정책상의 계열사 규정이 완화될 필요가 있다. 너무 엄격하면 민영화가 추진될 수 없고,너무 느슨하면 기업간의 페어 플레이는 확립될 수 없다.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말썽만 안나면 넘어가겠다는 식은 안된다. 지킬 수 있는 원칙을 분명히하고,정해진 규칙에는 가급적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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