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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정치 검찰 시비 벗어날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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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해 사정(司正)한다고 서슬 퍼렇던 1993년 봄이었다. 검찰이 동화은행 비자금 계좌를 찾아냈다. 노태우 정권 때 청와대와 민자당 정치인들에게 건너간 뇌물 리스트였다. 빙고! 기세 좋게 밀어붙이던 수사는 암초를 만났다. 금융계의 황태자 소릴 듣던 민자당 L의원 때문이었다. 2억원을 받은 혐의가 나왔는데 L의원은 몸이 아프다고 입원해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병원에서 “YS(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건네진 정치자금을 다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며칠 뒤 L의원은 일본으로 출국해 버렸다.

얼마 후 술자리에서 검찰 고위 간부로부터 기막힌 얘길 들었다. “사실은 우리가 내보냈어. L 때문에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가 없잖아.” 걸림돌이 치워지자 검찰은 리스트에 있던 다른 정치인들을 속전속결 처리했다. L씨는 수사가 완전히 종결된 94년 가을 유유히 귀국했다.

“아, 이런 게 정치고, 검찰이구나.” 아직 젊은 기자였던 내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 뒤 법조팀장도 했지만, 적어도 정치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의 태도에 대해선 개운치 않은 기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검사들은 “사회적 거악(巨惡)을 척결하는 게 검찰의 존립 이유”라고 말한다. 맞는 얘기다. 도둑과 강도, 사기꾼과 살인범을 처벌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의 기본 틀을 흔드는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고, 그걸 제거해 나가는 건 검찰 소명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검찰이 이런 소임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요즘 검찰은 뒤치다꺼리 전문인 것 같다. 권력형 범죄를 검찰이 먼저 인지(認知)해 수사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대신 이런 패턴이다. ‘<2009>①언론이 먼저 의혹을 보도한다 ②검찰은 수사 계획 없다고 한다 ③더 큰 의혹이 터진다 ④뒤늦게 수사에 착수해 속전속결로 몰아친다’.
아, 참 하나가 빠졌다. ⑤수사 결과를 발표하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이런 식이다 보니 흔쾌하지 않다. 죄 지은 자는 처벌받았고 정의는 구현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국민 사이에선 “세상은 다 그런 거야” 하는 부정적 인식만 팽배해진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씨의 스캔들, 정윤재 전 의전비서관의 수뢰 의혹은 권력형 비리의 극적 구성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정책실장이 청와대 코앞에다 한 달에 수백만원씩 하는 호텔형 아파트를 얻어 놓고 사기꾼 같은 여성 큐레이터를 위해 갖가지 압력과 권력을 행사한 게 사실인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청와대의 설명도 믿어야 하는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통령으로부터가 아니라 국민 세금에서 월급 받는 검찰은 그걸 밝혀야 할 사명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고 청와대 386의 핵심이었던 정윤재 전 비서관도 마찬가지다. 그가 과연 무슨 일을 했던 건지,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일부에선 이번에도 검찰 수사가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급한 불 끄기’로 끝날 것으로 본다. 변양균·정윤재씨를 구속하는 선에서 추석 전에 빨리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더 끌면 10월 초의 노 대통령 방북 일정에 재를 뿌릴 수 있고, 대통합민주신당 경선도 망가진다는 논리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런 얘기 자체가 검찰에 대한 모독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은 안 믿겠다. 대신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검찰과 현재의 검찰은 그래도 다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정치검찰의 오명을 누군가는, 그리고 언젠가는 벗어 던져야 한다. 이번이 기회다. 그걸 보여 달라.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