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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유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요일 오후 동네 기원에서 바둑 한판을 두고 나오던 주섭은 멈칫하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방금 눈 앞으로 지나간 중년 남자의 뒤통수가 아주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얼굴은 너무 빨리 지나쳐서 볼 수 없었다.
얼굴이 아닌,뒤통수가 낯이 익다면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그만큼 한 시절 친숙했던 인물이란 증거다.주섭은 걸어가는 인물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본다.키는 평균치보다 약간 작고 옷차림은 수수한 편이다.
특이한 건 그 남자가 마치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경황없이서둘러 걷고 있다는 점이었다.
『혹시 그 친구 아냐?』 주섭은 그를 놓칠까봐 중년남자 뒤를빨리 쫓아갔다.그를 따라잡은 주섭은 손바닥으로 다짜고짜 그 사람 어깨를 탁 쳤다.그 사람이 놀라서 돌아섰다.
『맞다!내가 잘 봤어.아니 이게 도대체 얼마만이야?자네 조승일이 분명하지?』 중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주섭을 바라본다.약간 곱슬머리에 이마와 눈이 튀어나온 둥글넙적한 얼굴,틀림없이 그 얼굴이다.
『어디서 뵌 분이시더라?』 그는 또 연극을 하고 있다.
『야!임마!쓸데 없는 연극 집어치워.내 앞에서 도망칠 생각은아예 말라구.일단 만났는데 내가 너를 놓칠 것 같냐?』 『미안해.사실 금방 자넬 알아봤다.하지만 워낙 습관이 돼놔서,실례했다.』 그제야 조승일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도 어쩔수 없는지 친구의 손까지 다정하게 붙잡았다.
이날 주섭이 조승일을 만났다는 것은 어쩌면 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우연도 두가지가 한꺼번에 겹치면 이건 우연 이상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우연은 바로 며칠전 격월로 만나는 동창들의 모임에서 발생했다.
대학문을 나선지 30년이나 지난 동기생들 친목모임인데 이런 모임의 성격은 어느 것이나 대체로 유사하다.
이 나이쯤 되면 비교적 잘 나가는 사람은 대기업체 중역,혹은중소기업체 사장,혹은 중진 교수가 되어있다.
관청으로 쳐도 최소한 구청장이나 세무서장쯤은 되고 아무리 처진 친구도 최소한 기업의 이사대리는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동창생 친목모임이란 전국에 있는 동창생 전원이 모이는게 아니고 동창 가운데 비교적 잘 나가는 친구들,입지가 비슷비슷한 친구끼리만 따로 모이는 모임인 것이다.
섭은 이 모임에서도 자기가 가장 처지는 축이라고 자인했다.
그는 오래 고교 교사를 지내다 마흔이 넘어 교직을 그만두고 자유기고가로 변신했다.
명칭은 그럴싸하나 실제 수입은 부끄럽게도 자신의 줄담배값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가 고된 교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아내가 때맞춰 친정 도움을 받아 신축 아파트 상가에 빵가게를 차렸기 때문이었다.
주섭은 그런 자신이 사장님들이 즐비한 친목모임에 한몫 끼고 있다는 사실을 늘 영광으로 알고 지냈다.
며칠전 바로 이 모임에서 조승일의 얘기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평소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는 꺼내지 않는게 관례이자,미덕이었다. 더구나 조승일이란 이름은 너무 까마득한 기억에 묻혀 있는 이름이었다.
『누가 조승일이 소식 아는 사람 있어?최근 만나본 사람이 있냐구?』 방적회사 부사장인 홍영표가 느닷없이 꺼낸 말이다.그는주섭을 쳐다봤다.
『자넨 알거 아냐.학교때 둘이 친했으니까.』 그러나 주섭은 머리를 흔들었다.
학교때란 30년 전의 일이다.
그뒤론 그도 조승일의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몇해 전 무슨 명함 찍는 가게에서 일한다는 소식은 들었던 것 같은데 말야.근데 조승일 소식은 갑자기 왜 묻지?』 독일 박사님인 박수열교수가 홍사장을 보고 의아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일이 있어.명함 가게란건 와전일거야.조승일이 설마 명함이나 찍고 앉았겠어.하더라도 제법 큰 인쇄소에서 하겠지.박교수.조승일이 학교때 한바탕 연극으로 사람 놀라켰던 일 기억나?5.16직후니까 우리가 2학년이었을 때지,아마.』 『기억나고 말고.미친척 해보이느라고 그랬던거야.난 그때 정말 그 친구 미친줄 알었어.평소 니체에 미쳐가지고 초인 어쩌구 하고 다녔으니까.』 『난 믿지 않았어.그뒤에도 성적은 늘 수석이었잖아.4.
19땐 또 어떻고.수업시간에 데모하러 나가자고 맨 먼저 선동한친구가 바로 조승일이 아냐.토니오 크뢰거 시간이던가.조승일이 먼저 뛰어나가니까 모두 따라나가고 교수만 덜렁 혼자 남았지.거키작은 김성필교수님,그땐 얼마나 딱해 보이던지.』 조승일의 연극이란,그가 어느날 점심때 학교 앞 식품점에서 돈도 치르지 않고 빵과 음료수를 잔뜩 들고 나와서 친구들에게 나눠준 사건이다. 가게주인이 달려와서 조승일의 멱살을 잡고 파출소로 끌고갔는데 그는 경관 앞에서 횡설수설로 일관했고 그 덕분에 무사히 방면될 수 있었다.
친구들은 그가 니체에 너무 심취한 탓이라고 말했는데 주섭만은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때가 바로 5.16직후였다.조승일은 스스로 4.19의 투사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 러다가 잇따라 5.16이 발생하자,그는 아주 무기력한 인물로 표변해 버렸다.주섭은 잇따라 발생한 이 두 사건 사이에서 친구가 받은 충격이 그의 미친 연극과 관련이 있을거라고그 당시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 친구 얘길 지금 꺼내는 이윤 뭐야?』 독일 정치학박사가 말을 꺼낸 홍사장에게 다그쳤다.홍사장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이 5월 아냐.문득 그때 일이 생각나서 그래.그리고 또하나 있어.87년6월 시위때 명동에서 난 그 친구를 봤어.몰라보게 허름한 옷을 걸치고 떨거지 같은 녀석들 속에 끼어 우두커니 서 있더라고.알은체 할까 하다가 옆에 부하직 원들이 있어 그만뒀지.』 『그때 자네 아직 남산에 있을 땐가?』 주섭이 무심코 물었을때 홍사장이 화난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임마,그럼 거기 있을 때니까 내가 거길 시찰나갔지.그렇지 않으면 거길 내가 뭣허러 가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화를 낸게 멋쩍은지 홍사장이 주섭에게 친근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자네가 승일이를 한번 찾아보라구.둘이서 친했잖어.제깐 놈이살았으면 이 서울바닥에 있지 어디 있겠어.우리도 이젠 안보이는친구들을 슬슬 찾아볼 나이가 된거 아냐?』 주섭은 조승일의 손목을 놓칠세라 꼭 붙들고 기원 바로 아래층에 있는 맥주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봐,바로 며칠전 자네 얘길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다니,기적이지?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 학교 졸업하고 처음 아냐?』 맥주잔을 내려놓고 주섭이 먼저 말했다.
『첨은 아닐걸.오래 돼서 시간은 잊었지만 60년대에 한번,70년대에 한번,자넬 두번 길가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나.긴 얘긴못하고 서서 헤어졌지만 말야.』 『그런가,기억력은 여전하군.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인쇄소에 다닌다는 얘길 풍문으로 듣긴 했는데.』 『그건 옛날이야.지금은 애들 공작품을 만들어다 팔고 있어.공장은 아니고 집안에서 아이들 두엇 데리고 내가 직접 일을 하지.경기가 나빠 겨우 지탱하는걸.』 ***조 승일이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그러고보니 친구의 모습에서젊은날의 기개는 간데 없고 먹고 살기 바쁜 중년남자의 고단함만역력했다.
주섭은 문득 홍사장의 얘기가 떠올랐다.
『내가 한가지 물어볼게 있네.자네 87년6월에 명동에 나갔던일 있어?』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나를 거기서 봤어?』조승일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냐.홍영표가 자넬 그때 거기서 봤다더군.자네도 데모를 했었나?』 『데모는 무슨.그냥 구경 나간거야.이 나이에 젊은애들과 함께 뛸 수 있겠어? 진짜 데모꾼은 내 아들녀석이야.그앤 졸업하고 지금은 회사 나가지.사실은 그 당시 아들녀석을 자꾸 만류하다가 거꾸로 그녀석에게 내가 당했네.아버지는 뭐냐? 지식인이면서 비굴하게 먹고 사는데만 머리를 써온 것 아니냐? 나는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재산도 물려받지 못할줄 알고있고 그걸 원치도 않지만 제발 아들을 비굴한 놈으로 키울 생각은 말아다오.이러는거야,글쎄.이건 내가 옛날 우리 홀어머님 에게 했던 말이네.그때 난 어머니 설득을 받아들였어.그래서 조용히 엎드려 살기로 작심했네.그 덕분에 30여년 군사정권 아래서도 털끝 하나 안다치고 살아왔지.아들이 애비의 그 아픈 약점을 찌른거야.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도 명동으로 뛰어나갔었네.돈은 물려줄게 없고 애비가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바보는 아니란걸 보여줘야 할게아닌가? 안그런가?』 주섭의 눈에는 친구의 얼굴이 다시 옛날로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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