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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참여정부 주역으론 이명박 못 이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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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06면

신동연 기자

만난 사람=최훈 정치 에디터

대통합민주신당 예비후보

-경쟁 후보들로부터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집중 공격을 당하는데 마음이 어떤가.

“대선 후보 경선이라는 게 권력투쟁이니까 그러려니 생각한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현실로 나타나는 거지. 다만 열린우리당이 안 되겠다며 버리고 나왔는데 자꾸 열린우리당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버린 건데 자꾸 다시 들어가려 그런다.”

-조직 싸움에서 어려움이 있다는데.

융합의 시대를 설명하던 손학규 후보가 갑자기 옆에 있던 송영길 의원의 DMB폰을 들더니 “이게 전화냐, 카메라냐, TV냐”고 물었다. 통합의 능력을 강조하는 거였다.

“과거식 조직에 의존하는 경선이 마땅치는 않다. 그렇다고 이러쿵저러쿵하지는 않겠다. 나로선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할 때가 (한나라당을)탈당할 때보다 더 고민이 깊었는지 모른다. 탈당은 새 길을 찾아 나선 것이지만 신당 참여는 나 스스로 새로운 길의 모습을 규정해 국민에게 ‘이것입니다’ 하고 보여주는 거니까. 한데 창조적인 ‘제3지대’의 모습이 아니어서 고민이 컸다. 그러나 창조는 만들어 가는 거다. 당장은 진흙탕 싸움이 될지 모르지만 홍수가 와서 강이 흙물이 돼도 차츰 맑아지듯이 그런 길을 만들어 가자는 생각이다. 조직 동원 선거, 혼탁 선거의 조짐도 보이는데 이 길을 헤쳐나가 새 길을 만들자는 각오로 한다. 어려움은 많다.”

-이명박 후보는 ‘정권 교체’를 주장한다. 손 후보가 되면 ‘정권 승계’인가.

“정권 교체냐 정권 승계냐 하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번 대선의 관건이다. 이제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박정희∼노태우 정부가 한 시기였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한 텀(기간)이다. 민주화 정부는 노 대통령이 마지막이 될 것이고 선진평화의 새로운 정치적 장이 열리게 된다. 그 첫 대통령이 손학규가 돼야 한다. 이명박 후보는 오히려 과거로 돌아간다. 자신이 동일시하려는 박정희 스타일의 리더십이다.”

-‘나만이 이명박 후보를 꺾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경제와 통합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대통령을 결정해왔다. 이명박 후보는 현대건설 사장을 했으니 경제를 알 거다, 청계천을 했으니 뭘 이뤄낼 거라고 그러지만 다 허상이다. 나는 실상을 갖고 있다고 자신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이 후보는 국민에게 보이는 걸 한다. 청계천, 눈에 보이지. 버스 중앙차로, 서울시청 앞 광장, 다 사진 찍힌다. 문화사업마저 오페라하우스 건설이다. 내가 경기도를 운영한 철학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거였다. 전 세계를 다니며 기업을 유치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일자리, 연구개발(R&D) 투자, 문화 콘텐트에 힘을 쏟았다. 국민은 (지도자가) 실천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편안함을 담고 있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이 후보의 독선적 이미지는 한편으론 국민에게 불안을 준다. 내가 한나라당에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표적이 되지만 정치적 통합을 생각할 땐 그것이 자산이 될 수 있다. 또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가 한반도 평화다.”

-한나라당에선 3등을 하던 손 후보가 본선에 나와봐야 필패할 거라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에선 내가 3등 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고 나가라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 않나. 북한에 모내기하러 갔을 때,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대체입법하자고 했을 때, 당 지도부에서 변호하거나 엄호해준 경우도 없다. 많은 한나라당 당원이 손학규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내 정체성이 부담스러운 거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물러난 이후 내가 제대로 된 당직 한 번 가진 일이 있나.”

-그래도 도지사에 오르지 않았나.

“한나라당의 단물을 빨아먹었다고들 하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내가 속 좁은 사람이 되니까…. 나로 인해 한나라당 이미지가 좋아진 점이 있다. 내가 (16대 총선에서) 조세형씨하고 경기도 광명에서 붙었을 때 아무도 안 나가려 했다. 당에서 나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변에선 ‘손에 피 안 묻히고 당신 죽이려는데 나가지 마라’고 말렸다. 그러나 나갔다.”

-범여권 쪽 사람들은 한나라당과 어떤 점이 다른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진취적이고 전향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인터뷰에 배석한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송영길 의원을 가리키며) 대표적이지.”

-한나라당에 비해 전투력은 어떤가.

“이쪽이 상당히 강인한 면이 있다. 한나라당은 이명박·박근혜 후보 대결이 첫 본격 경선이 아닌가 싶은 데 비해 이쪽은 당내 경선 경험이 많아서 치열하다.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노 대통령은 과거에 손 후보에게 우호적인 발언도 했는데 최근 비판이 많아졌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노 대통령 얘기는 다 아니까 이제 그만…. 내가 노 대통령에 대해 무슨 억하심정 가질 게 있나. 나는 노 대통령의 업적이나 공은 인정을 한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은 국민을 편하게 해주는 대통령이다. 국민들 사랑을 받으면서 그 다음을 준비하는 정부였으면 좋겠다. 선거에 관여하고 편을 들거나 대통령 이후의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거 같다. 국민은 대통령이 선거에 간여하면 자기 몫을 챙기려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나.

“밥이 최고다. 난 밥을 먹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못 먹으면 불안하다. 내가 대통령 되면 우리나라 쌀 농가들이 걱정을 안 할 거다.”

-도피생활 중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있는 것으로 안다.

“어머니는 막내인 내가 빨갱이가 된 거 아니냐는 걱정을 안고 돌아가셨을 거다. 도망다닐 때 어머니가 간암 판정 받으신 얘기를 듣고 형에게 부탁해 병원을 옮길 때를 틈타 병실로 찾아갔다. 1년 반 만에 만나 반가우셨을 텐데 보자마자 ‘네가 여기 웬일이냐, 집안을 다 망치려 왔느냐, 빨리 가라’고 하시더라. 얼마나 당했으면 그러셨겠나.”

-다른 자식들 걱정 때문이었나.

“형들이 공군 장교고, 은행원이고 했으니까.”

-일각에선 광주 민주화운동 시절에 무얼 했느냐는 문제 제기가 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 내가 웃고 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된 시각에 나는 김해 보안대 지하실에서 48시간 동안 두들겨 맞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 사망을 사흘 만에 알았다. ‘서울의 봄’이 왔고 내가 80년 4월쯤 (영국으로) 나가려는데 그때 민주화운동했던 친구들, 조영래·김근태·장기표, 이런 사람들이 ‘우리 세상이 왔는데 어디 가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너희들이 일 좀 해라. 난 바깥 세상 좀 보겠다’고 떠났다.”

-그래서 뭘 봤나.

“내가 갔을 때 소위 ‘영국병’이 심했다. 맨체스터 같은 공업도시를 가면 시커멓고 녹슨 설비들이 괴물같이 서 있고 문 닫힌 공장엔 쓰레기만 찬바람에 쓸려 다녔다. 유럽식·영국식 사회주의의 허점을 보며 시장경제를 다시 생각했다. 동구에 개방과 개혁의 바람이 불고 영국에선 대처, 미국엔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다. 커다란 변혁을 보면서 세계가 함께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내가 운동권의 일원으로 국내에 머물렀다면 오늘날 나 자신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했을 수 있다.”

-교수·국회의원·장관·도지사 등 다양한 일을 했는데 돌이켜 보면 후회로 남는 것은 없나.

“의원 시절 재경위를 담당하면서 입법활동을 활발히 못한 게 아쉽다. 당시엔 의원 입법이 활발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선구적으로 산업과 금융을 좀 더 국제경쟁에 적응하도록 틀을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도지사 퇴임 후 ‘민심대장정’을 통해 서민들의 삶을 체험했는데 어떤 직업이 가장 고되게 느껴졌나.

“역시 탄광 막장이 가장 힘들었다. 숨도 잘 못 쉬겠고. 어부도 너무 어려웠다. 새벽 세 시에 8명이 배를 타고 두 시간을 나가 고기를 잡고 여덟 시에 돌아왔는데 번 돈이 모두 30만원 정도였다. 기름값을 빼면 정말 남는 게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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