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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망친 어떤 하루/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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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동차는 나쁘다.』
부총리를 지낸 장기영씨가 평소 아끼던 한 젊은 언론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신문에 쓴 조사의 첫머리다. 벌써 20여년전의 일이지만 이 한마디말에 「필요악」의 존재일 수 밖에 없음에도 어쩔 수 없이 자동차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들이 집약돼 있다. 서울시내 자동차 보유대수가 7만여대,전국적으로는 30만여대에 불과하던 시절 『자동차는 나쁘다』고 개탄했던 장씨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그보다 15배 이상 늘어난 오늘날의 자동차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나쁘다」는 말의 15배 정도로는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쟁」이라 하고,또 어떤 사람은 「지옥」이라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교통문제와 관련한 우리네 실상이다.
○난데없는 고지서 와
이리 부대끼고 저리 시달리면서도 사람들은 군소리없이 자동차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처음 직장을 갖거나 결혼해 새 살림을 차리게 되면 자동차 장만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삼는 것도 이제는 극히 자연스런 일처럼 되어 있다. 자동차 때문에 이런 저런 곤욕을 치러도 자신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저 일진이 나쁜 탓으로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최근 한 샐러리맨이 24시간 사이에 겪은 자동차와 관련한 몇가지 에피소드는 우리네 삶속의 자동차,자동차속의 우리네 삶을 실감있게 대변한다.
어느날 저녁 동창모임에 참석해 술잔을 기울이다 운전을 포기하고 다른 차편으로 귀가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주차위반 과태료 고지서」였다. 2개월쯤전 서울 삼성동에서 주차위반했으므로 벌금 3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자동차를 몰고 그곳에 간 일은 없었으므로 관계 관청의 착오일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는 했지만 이 일로 공무원들과 승강이를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짜증이 가시질 않았다.
○택시타니 “거긴 안가”
이튿날 아침 그는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빈 택시는 많았으나 그를 태워주는 택시는 없었다. 행선지만 물어보고는 대꾸도 없이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서너대의 빈 택시를 그렇게 보내고 난후 그는 빈 택시가 멈춰서자 무조건 올라탔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가 뒷자리를 돌아다보며 행선지를 물었다. 시내쪽이라고 방향을 대니까 기사는 『내리라』고 「명령」했다. 까닭을 묻자 기사는 출퇴근시간에 지하철역까지 합승으로 몇차례 왕복운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지입금을 충당하지 못한다면서 계속 내리라고 다그쳤다. 분개한 그가 도대체 택시는 왜 있는 거냐며 승차거부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기사는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고는 신경질적으로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그는 앞자리 등받이에 얼굴을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그가 『내려달라』고 했지만 기사는 대답도 않고 난폭하게 차를 몰면서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상소리까지 거침없이 내뱉었다.
○딱지떼곤 “나몰라라”
이렇게 시작된 그의 불쾌한 하루는 주차위반 관계로 관할구청에 전화를 걸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가까스로 담당자를 불러내 상황을 설명하고 알아봐줄 것을 부탁하면 기다리라 해놓고 몇10분씩 감감 무소식이기 예사였다. 두시간동안 서너차례 통화끝에 듣게 된 담당자의 해명은 사진 판독 잘못으로 생긴 착오니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차로 인한 그의 곤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그는 신호위반으로 스티커를 발부받았다. 길 한복판에서 신호가 노란 불로 바뀌어 그대로 전진한 것 뿐인데 멀리서 달려온 교통경찰관이 이쪽 설명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딱지」부터 뗀 것이다. 동승자는 물론 가까이 있던 경찰관까지 위반하지 않았다고 거들었으나 그 경찰관은 일단 발부된 스티커는 어떤 경우에도 무효할 수 없으므로 본서에 가 이야기 해보라며 그대로 가버렸다.
하기야 크고 작은 자동차사고로 1년에 수천 수만명이 죽고,다치고 하는 판국에 이 정도의 일쯤이야 그저 「재수없는 어떤 하루」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일는지도 모르지만 차로 인해 받게 되는 이런저런 사소한 곤욕들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많은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일의 능률까지 크게 저하시키기 때문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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