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화점 처음 세운 「조선 최고갑부」/타계한 박흥식씨 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28세때 「화신」설립 혁신경영기법 도입/62년 「원진레이온」 세우면서 “쇠락의 길”
박흥식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을 세운 「조선 제1의 부자」였다. 「회장」 칭호보다 「사장」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그는 자유당정부 초기까지만해도 우리나라 제일의 갑부였지만 말년이 좋지 않은 「불운한 경영인」이었다.
박씨는 1903년에 태어나 한세기를 살면서 영욕을 함께 한 인물이다. 60년대 이후 급격하게 어려워진 화신그룹의 형편 때문에 「상술은 뛰어났으나 경영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받았지만,국내 자본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이며 근대적 의미의 서비스산업에 경영학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평남 용강의 2천석군 부농출생인 그는 16세때 진남포의 객주와 연결,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쌀가게를 운영하는 장사수완을 발휘했고 약관 20세에 선광인쇄소를 설립,최연소 경영인으로 등장했다. 고향에서 경영수업을 한 그는 서울에 올라와 28세 나이인 1931년 당시 귀금속판매점인 화신상회를 인수,화신백화점 신화를 창조했다.
박씨는 당시로선 생각하기 어려운 경품부 바겐세일,체인점 설치와 같은 혁신적인 경영기법을 도입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총독부를 비롯,유력인사들과 사귀기 위해 금박이 명함을 사용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일제말기 황군에 비행기 보내기운동을 하는 등의 친일행각으로 광복후인 49년 반민특위 구속 1호가 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박씨는 백화점 재벌로 자리를 잡았으며 전쟁 특수로 무역업에서도 재미를 보았다. 한때 서울 종각옆 화신백화점에서 안국동에 이르는 대부분의 부동산이 박씨 소유로 알려질 정도였다.
6·25이후에도 박씨는 55년에 신신백화점을 여는 등 잘 나갔으나 5·16 직후인 62년 5월 혁명정부의 권유에 따라 흥한화점(현재의 원진레이온)을 설립하면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내자 41억환(4억1천만원)과 외자 1천50만달러를 들인 당시 동양 최대규모의 이 비스코스(인견사) 공장은 자금조달이 잘 안돼 준공이 2년 이상 늦어진데다 불경기까지 겹쳐 제대로 가동도 못해 보고 69년에 산업은행으로 넘겨졌다.
박씨는 그후 화신전자(72년),화신소니(73년)를 설립해 재개를 노렸으나 화신그룹은 지난 80년 10월 3백23억원의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화신소니는 아남산업으로 넘어갔으며 화신산업도 간판을 내렸다.
그의 재기집념은 끈질겨 88년까지만해도 남은 재산을 정리해 경기도 판교부근에 대규모 유통센터를 지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89년 5월 빚때문에 58년동안 살던 서울 가회동 집마저 처분해야 했고 말년을 삼성동 40평짜리 단독주택 전세집에서 칩거하면서 병마와 싸웠다.
박씨가 남긴 것은 서울 신림동 광신학원(광신중·고교,광신상고)인데 현재 장남인 병석씨(59)가 이사장을 맡아 운영중이다.<박승희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