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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세대의 리모컨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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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한 기자는 가장 큰 특징이 ‘리모컨 선거’였다고 말했다. 1차 투표를 며칠 앞둔 시점까지 부동표가 50% 안팎에 달했는데 이는 과거에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유권자는 전통적으로 정치 성향이 비교적 명확한 편이었다.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당이나 공산당 사이에서 지지 후보가 바뀌는 경우는 있지만 좌우를 넘나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달랐다는 것이다. 20·30대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가 막판까지 판세를 안개 속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거를 TV 보듯 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축구경기로, 다시 쇼프로그램으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표심도 그렇게 자주 움직였다. 프랑스 기자는 “어제 우파인 사르코지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다음날 좌파인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로 옮겨 가는 식의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여러 차례 나타나 선거 전망 보도에 애를 먹었다”고 토로했다.

 이른바 리모컨 선거의 실체는 이미지 정치였다. 선거를 앞두고 장애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 하나가 루아얄의 지지도를 확 끌어올렸다.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사르코지가 대학생들과 카페에서 생맥주 잔을 들어야 했다. 사르코지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지적에 아프리카계 유명 래퍼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한 대학 교수는 이를 미디어의 대이동으로 설명했다. 그는 르몽드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성당 갈 때나 등·하굣길에 폼 잡으려고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여론은 주로 인터넷에서 형성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가벼운 얘깃거리에 우르르 몰려다니고 거침없이 댓글을 단다. 예전처럼 오랜 시간 건전한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사이버 공간의 예의 없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여론을 지배한다. 이는 선거판에도 적용되는 룰이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로 화제가 넘어갔다. 지난번 한국 선거가 전형적 ‘키치 세대’의 리모컨 선거였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키치(Kitsch)는 독일어로 원래는 사이비 또는 싸구려 예술품 등을 뜻하는 미술용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문학 작품이나 비평 등에서 세상에 무관심하면서 속물적인 것을 좇는 부류,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회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키치 세대’라는 말이 폭넓게 쓰였다.

 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그냥’ 이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좋아하거나 그냥 싫어한다. 그 대상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는 노력도 없다. 기성세대는 그냥 고리타분하고, 뭔가 튀어 보이면 멋있다는 식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키치 세대로 표현되는 20대 초·중반∼30대 초반이 무더기로 유권자 대열에 합류한 지난 대선에서 바로 그 위력이 드러났던 것이다. 공약이나 비전보다는 감성적 제스처 하나와 충동적 연설 한마디가 선거판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음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보나 낙선한 후보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몇 달 뒤면 다시 대통령 선거가 있다. 키치 세대를 포함한 유권자들이 더 이상 리모컨 돌리듯, 인터넷 서핑하듯 즉흥적으로 대통령을 고르는 방식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후보자가 누구인지 공약이 어떤 게 있는지, 정도는 알려는 노력이 유권자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다.

전진배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