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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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기도실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학이라는 게 등교를 정지시킨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음산한 기도실에 처박아놓고 끊임없이 시말서와 반성문을 써대게끔 변질돼버렸다는 걸 우리가 미리 알았다면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행실의 어디가 잘못된 것이었는지,또 교칙 의 어떤 부분에 어긋나는지를 따지고 들었을 것이지만,이제는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뒤늦게 어설프게 대들다가는 오히려 혹이 하나 더 붙어서 돌아올 가능성이 더 높았다.그러지 않아도 생활지도부 선생님들은 우리를 최소한 무기정학에 처해야 한다고 교장선생님에게 건의했었다지 않은가.
『우선 오늘은 시말서를 써.아주 자세하게,그 여자애들을 처음에 어떻게 만난 건지부터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써야 돼.물론 마석에서의 일은 말할 것도 없구 말이야.너희들끼리 있다고 떠들고 놀다가는… 그땐 무조건 각오 해.』 도깨비 선생님은 이렇게 겁을 주고 기도실을 나갔다.
『그래두 야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꼰대들 눈치보면서 앉아 있는것보단 이게 어디니.』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영석이었다. 『임마 당장 오늘 밤에 집에선 어쩌구? 다 연락한다잖아.』홀어머니의 외아들인 상원이였다.상원이는 무슨 말썽이 생길 때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차라리 몇대 얻어터지는 게 훨씬 속 편하겠다고.홀어머니가 토해놓는 한숨소리는 매 보다 훨씬 더 견디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집 이야기가 나오니까 졸지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엄마들을 생각하면 참 다들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였다.
『나 잠깐 전화하구 올게.』 갑자기 써니가 보고 싶었다.
『너 도깨비가 느닷없이 쳐들어오면 어쩔라구….』 『이 쪼다야,정학당한 놈은 오줌도 안누냐.금방이야.』 수업중이라 매점 옆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전화가 비어 있었다.나는 써니의 삐삐 번호를 누르고 나서 또 2번을 눌렀다.음성 사서함을 이용하면 써니가 곧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였다.
-나 달수야.우린 일주일 정학 먹었는데 그냥 기도실에서 죽치고 있는거야.그리구 너한테 물어볼게 하나 있는데… 어어 그게 뭐냐믄… 내가 대학에 못들어가면 말이야,그러면 너 나 안만날 거니.이따가….
거기까지 말했는데 저쪽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났다.그러면 더이상 녹음이 안되는 거였다.그래서 다시 동전을 넣고 삐삐를 쳤다. -난데 하여간 이따가 일곱시에 이대입구 날개에서 만나.만나서 그거 꼭 대답해줘.나 사실은… 쪼끔 불안하거든.이상이야,오바. 기도실에서의 첫날은 온종일 시말서라는 걸 긁적이면서 보냈다.그걸 도깨비에게 바치고 겨우 학교에서 풀려났는데,다들 학원에 갈 기분이 아니라고 그랬다.그래서 우리는 신촌 네거리 근처의 중국집으로 몰려가서 고량주 한병을 갈라 마셨다.누 구에게랄 것도 없이 괜히 상소리들을 해가면서.
일곱시가 돼서 「날개」에 갔는데 써니가 보이지 않았다.
『달수 맞지?난 선희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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