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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어버이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발목 하나 다친 것뿐인데 몸이 천근은 되는듯 무겁게 느껴진다.
기다시피하여 침대까지 올라간 은옥은 우선 등허리를 털썩 누이고다음엔 다리 하나를,마지막으로 아픈 다리를 조심조심 끌어올린다.조금 전 길 건너에 있는 한의원까지 가 바늘꽂이 에 바늘 꽂듯 소복이 침을 맞고 왔건만 복숭아뼈 언저리의 부기는 어째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다.
아홉살 난 딸 수영이 안방까지 쫓아와 뾰로통해진 얼굴로 인형머리카락을 빗질하고 있다.
저 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아무리 애라지만 제 어미가 이렇게 다쳤다는데 도무지 쳐다보는 시늉도 않으니,혼자 생각을 하다가 은옥은 딸애에게 말을 건다.
『수영아,피아노 연습해야지….너 내일 시험이라면서.』 『피이,난 혼자 하기 싫은데….엄만 괜히 아파가지고….』 아이가 삐죽거리며 일어나더니 방문을 꽝 닫고 나가 버린다.은옥은 한숨을『후우』쉬곤 다친 발목을 다시 한번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 본다.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아무래도 벌을 받았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벌이 아니라면 돌쟁이 어린애도 아니요 팔십 노인네도 아닌 서른살짜리 여자가 겨울 빙판길도 아닌 멀쩡한 대낮 아파트 계단을헛디딜 이유는 없었다.게다가 하필이면 대전 친정 엄마가 보낸 소포 찾으러 내려가던 길에….
친정 엄마가 보낸 누런 꾸러미 속에는 딸애의 원피스 한 장이들어있었다.분홍색 땡땡이 원피스에 어울리지도 않는 흰 세일러 칼라,코사지까지 주렁주렁 달린 옷은 못 할 말로 더도 덜도 아닌 친정 엄마 수준이었다.
오늘 아침,어버이 날 이라고 건 전화통화에서 들은 엄마 말대로라면「수영이에게 딱인」,그리고 정작 입어야할 딸애 표현에 따르면「너무 촌스러운」.
『명색이 어린이 날인디 핼미가 되갖구 가만 있을 수 있겄냐.
아래 시장 갔다가 우리 수영이 입히문 딱이겄다 싶은 원피스가 있길래 하나 사서 부쳤어야….』 『옷이야 서울에 더 많은데 뭐하러 부쳤어요.』 『옷이 뭐 없을까봐 부치남.내 맴이 그렇다는것이지.』 『…그건 그렇구요.오늘 어버이 날이기두 하구 그래 한번 내려가려구 했는데 아무래도 못 가겠어요… 몸살인가봐요.며칠째 죽겠어요.』 이 대목에서 은옥은 생각이라도 난듯 목소리에힘을 뺐다.거짓말로 먹고 산 사람도 아니건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큼큼,마른 기침까지 두어번 터뜨렸다.
『젊디 젊은 것이 오뉴월에 감기는 웬 감기…김서방도 없다매 그래 먹는 건 어떻게 하구 있는겨?』 『하루 이틀 제대로 안 먹는다고 어떻게 되나?그럭저럭 먹으니까 걱정마셔요…그리구 어제돈 좀 부쳤어요.괜히 아낀다고 꽁쳐두지 말고 엄마 사고 싶은 거 하나 사세요.』 『돈을 뭐하러 부쳐 부치길…니들도 돈 만날째는 거 나도 다 아는디.』 는 길에 좀 더 쓸걸.친정 엄마가그렇게 나오자 은옥은 어제 부친 돈 5만원이 갑자기 부끄러웠다.아무리 출가외인인 딸이라지만 손바닥만한 식당 하는 오빠네 뒷방에 사는 엄마를 몰라라 하는 걸 생각하면 이럴 때라도 10만원 한 장은 써 야 했다.은행까지 가는 동안 10만원이냐 5만원이냐를 몇번이나 뒤집다가 은옥은 에라 모르겠다,5만원을 송금했다.이번 달부터는 새로 시작한 딸애 수영강습비도 따로 떼내야하고 지난 크리스마스때 큰 맘 먹고 12개월 할부로 산 피아노값도 아직 멀었고…아무튼 쓰고싶은대로 쓰다간 남아날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쪼끔 부쳤어요.증말 쪼끔예요…죄송해요.봐서 이 달안에라도 한번 내려 갈게요.오빠랑 올케랑두 잘 있죠?』 아닌게 아니라 친정 나들이는 봄 내내 은옥에겐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작년 추석때 내려가 얼굴 찔끔 보이곤 올라와 설 땐 아예 내려가지도 않았으니까.며칠 전만 해도 은옥은 이번 어버이 날엔무슨 일이 있어도 고속버스를 타리라 맘 먹었었다.
그런데 두 시간이면 가는 대전행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문제는은옥의 상전,그러니까 딸애였다.
내일 모레 음악 실기시험이 있는데 선생님 말씀이 피아노를 칠수 있는 사람은 노래 대신 피아노를 쳐도 좋다고 하셨고,그래서자긴 피아노 연습 때문에 대전엔 갈 수 없다는 거였다.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은옥은 아이에게 지고 말았다.남편의 비난처럼 애 일이라면 쩔쩔매고 끌려다니는 좀모자란 엄마라 매도당해도 어쩔 수는 없었다.그렇지만,변명처럼 들려도 할 수 없지만 그녀도 할 말은 있었다.
부모인 이상 자식에게 모든 여건을,아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충분한 여건을 만들어 주는건 기본적인 의무내지 책임이라는 것,이게 굳이 말하자면 은옥의 교육 지론이었다.
그리고 이 문젠 사실 은옥으로선 오랜 세월에 걸친 자못 심각한 철학이기도 했다.학교에 다녀오면 조막만한 손으로 부엌에 들어가 저녁거리 쌀을 씻어야하고 몇 푼 안되는 육성회비도 제 때못내 담임에게 불려 다니던 그 지긋지긋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며그녀 나름대로 다짐에 다짐을 한 게 있다면 바로 이것,내아이에게 만큼은 뭐든 해주리란 거였다.
깜박 잠이 들었었나.딸애의 등당거리는 피아노 소리에 은옥은 눈을 뜬다.한다하는 선생 밑에서 벌써 2년째건만 아이의 피아노소리는 아직도 어설프기만 하다.
『수영아,수영아,제대로 쳐야지.그렇게해서 음악시험 보겠니?』다리 때문에 가지도 못하고,괜한 부아가 치밀지만 음성을 한껏 가다듬고 은옥은 아이에게 소리를 친다.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아이는 대답이 없다.
피아노엔 별 취미가 없어 보이는 아이에게 억지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건 순전히 은옥의 욕심에서였다.이름이 숙정이었었나.
아버지가 대장이라든가 중장이라든가였던 그녀의 국민학교적 짝꿍.
흰 레이스 칼라에 곤색 벨벳 원피스가 먼저 떠오르 는 그 앤 공부는 엉망이었지만 피아노 하나는 전교 1등이었다.
***체 르니니,소나티네니…자기 키 반만한 피아노책을 옆구리에 끼고 군인 지프에서 톡 뛰어내리며 그 애는 조금은 거만하게지껄이곤 했다.「난 이담에 커서 피아니스트가 될거다」피아니스트,피아니스트라니…그토록 화려하고 낭만적인 이름을 제 것으■ 할수도 있다니…부러움과 질투심,열등감…들쭉날쭉한 그 마음을 삭이는 일이 어린 은옥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논 두바퀴를 채 못 치고 피아노 소리가 뚝 멈춘다.그리곤 뭘 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질 않는다.수영아,수영아,불러도 대답이 없다.
은옥은 침대에서 내려와 깽깽이 걸음으로 딸애 방으로 간다.방바닥에 길게 엎드려 아이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뭐하니? 아이가 감추는 공책 가득 공주 인형이 그려져 있다.은옥은 거칠게 아이를 쥐어박는다.
『피아노 연습 땜에 할머니네두 못 간다며?너 지금 뭐 하니?』 『내가 뭘?그림 한 장만 그리구 하려구 했는데 엄만 아무 것두 모르면서….』 『모르긴 엄마가 뭘 몰라?그리고 너…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엄마 다리 다쳐 꼼짝도 못하는데 넌 걱정두 안되니?게다가 오늘은 어버이 날이라며?』 ***아 홉살 난 애한테까지 이 억지를 떨어야하나 싶으면서도 은옥은 하루 종일 딸애에게 쌓였던 말을 다 꺼내버린다.아니 어쩜 하루 종일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며 쌓이고 쌓였던 배반감,서글픔인지도 모른다.자식은 다 그런걸까.깨진 항아리처럼,메아 리 없는 산처럼 무심하게,아이는 그녀의 정성과 사랑에 10분의 1도 화답을 주질 않았다. 『피,난 엄마 싫어.맨날 피아노 쳐라,공부해라,학원가라잔소리만 하면서.』 아이가 발딱 일어나더니 현관 밖으로 뛰어나간다. 『피아노 치다말고 너 어디가니?』 뛰어나가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곤 검지손가락 두 개를 양 볼에 쑤셔대며 용용 죽겠지를 한다.
뎅,뎅,뎅…마루 괘종시계가 7시를 알린다.놀이터엘 갔는지,위층 친구네 갔는지 아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은옥은 어둠이습자지처럼 배어들기 시작한 마루 유리문으로 고개를 뺀다.그리고그녀는 어둔 유리문 너머로 어린 시절 자신의샤 모습을 본다.숙정이네 잔칫날,엄마가 그애네 집 허드렛일을 해줬다는 걸 알고는마을 뒷산에 올라가 해거름까지 쪼그리고 앉아 울었던 일,대학 졸업 때까지 입학식.졸업식에조차 엄만 학교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 일,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자라 남편과 결혼할 적에 그에게 쭈그러진 엄마를 보이는 일이 죽기 보다 싫었던 일…돈이 없어 그렇지 실은 엄마도 마음으론 내게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었을지 몰라,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드는걸까,은옥은 생각한다.
괘종 시계가 뎅,다시 30분이 지났음을 알린다.이 계집애가 정말…조금씩 걱정이 되고 은옥은 갑자기 상소리를 하고 싶어지는걸 애써 억누른다.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수영이니? 너 정말 이렇게 엄마 속 썩일….』현관문을 열고은옥은 깜짝 놀란다.거기엔 딸애가 아닌 친정 엄마가 서 있다.
『아프단 소릴 듣고나니께 당최 일이 손에 잡혀야지.그래서 이참에 한번 와본다 하구 올라온겨.워떤겨? 몸살은 좀 괜찮은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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