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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3.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교장선생님은 예 들기를 마치고 본론으로 돌아오셨다.
『…내 말 알아 듣겠지.너희들이 여자애들하고 놀고 싶어하고 호기심이 가는 거는 알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거야.사춘기가 뭐니.생각하는 시기지 실행할 때는 아니다 이거지.중요한 것일수록 절제하고 아낄줄 알아야 되는 거야.나중에 몸도 마 음도 완전히어른이 된 다음에 더 좋은 걸 느껴야 할 거 아니겠느냐구.그렇지?』 네,하고 우리 넷은 거의 동시에 씩씩하게 대답했다.나는교장선생님이 말씀을 끝내시려는 것같아 그것이 기뻤던 것이다.
내 옆에 나란히 선 죄인들-좌로부터 승규,상원이,영석이-역시교장선생님을 굳이 싫어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다만 그녀는 답답한 어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 중에서도 교장선생님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우리는 무조건 마흔 살이 넘 은 인간들은 우리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별종의 괴물들이라고 결론을 내고있었는데 그녀는 쉰 살도 훨씬 넘었기 때문에,이미 우리가 좋아하거나 싫어할 대상에서 제쳐놓았던 거였다.괴물들에 대해서 말하다가,관둬 말해봐야 입만 아프니까 라고 우리는 우리끼리 투덜거리곤 했다.
하여간 녀석들은 아마도 교장선생님을 그저 골치 아픈 할머니쯤으로 치부하면서 네 하고 크게 대답한 게 틀림없었다.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게 십상이었다.과일이나 생선이 아니라 적어도 성에 대해서라면 그래도 교장선생님 보다 는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을걸요….
『허허 이 녀석들 참….』 우리의 씩씩한 대답소리에 교장선생님이 웃으셨다.그 웃음은 복잡한 거였지만 어쨌든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내가 졌어.기가 막혀,그렇지만 너희들이 귀여워 죽겠어하는 그런 표정으로,교장선생님은 그때까지 자기 옆에서 침묵하고있던 도깨비 를 돌아보셨다.도깨비는 생활지도부 주임 선생님으로,그러니까 수사반장 중에서도 캡이었고,말하자면 우리 전교생이 한마음 한뜻으로 참 끔찍이도 미워하는 공적1호였다.
기회를 포착한 도깨비가 큰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놈들아,하라는대로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말이야.글쎄 얼마든지 예쁜 여자들하고 잘 살 수가 있지만 말이야….』 좋은 대학… 좋은 대학… 도깨비는 정말이지 우리를 가장 잔인하게 고문하는 방법을 잘 터득하고 있는 거였다.우리는 정말이지 그 소리만 들으면 아주 미치고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얼른 딴 생각을 해야 한다고 작정했다.그래서 도깨비의 말소리가 내 귀를 침범하지 못하게 만들자.교장선생님이 말하는 걸로 봐서 그녀도 한번쯤은 아주 뜨겁게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스물 몇살쯤에,그러 니까몸도 마음도 완전히 어른이 된 다음에 아주 좋은 걸 느껴봤으니까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할수 있는 게 아닐까.
『…너흰 글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놈들이야.농뗑이나 치고 벌써부터 여학생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녀석들을 어떤 여자가 좋다고 그러겠느냔 말이다.대학도 못가고 변변한 직장도 없을테고….』 젠장,도깨비는 계속해서 공갈을 치고 있었다.어쨌든 난 써니를 만나면 한번 심각하게 다짐을 받아둬야겠다고 생각했다.내가 대학엘 못갔다고 나를 떠날 써니가 아니었다.어른들처럼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할 써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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