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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조계종 문중 어떻게 얽혀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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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 이상 문중싸움은 없어야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徐義玄前총무원장이 사표를 던지며 마지막 한 말이다.그의 말은 3월29일 이후의 조계종사태를 불교계의 門中싸움으로 몰아가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번 사태는 3選연임을 노린 徐前총무원장의 무리수와 80년대 이후 줄곧 제기된 불교계의 개혁운동이 시대적 기운인 「개혁」과 맞물려 일어난 필연적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그럼에도 그가 던진마지막 말은 불교계는 물론 사회적으 로도 적지 않은 파장을 던져주고 있다.과연 불교계의 문중이란 무엇이며,그것이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쉽게 말해 불교의 문중이란 용어는 사회일반에서 쓰는 문중이란말과 다를 바 없다.일반 문중이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불교의 그것은 法脈을 통해 형성된 家系圖다.출가한 승려는그 순간 세속과 혈연의 관계를 끊게 된다.대신 승려로서 자격을부여받는 沙彌戒를 받을 때 스승을 정하고 그와 인연을 맺는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평생 그를 따라 다니고 같은 스승에게서 계를 받은 道伴은 형제가 되어 師兄師弟라 부른다.
형제가 많으면 당연히 서열이 정해지게 마련이지만 형제 가운데법맥을 전수받는 제자가 따로 있어 서열이 무너지기도 한다.
俗家의 문중처럼 불교계의 문중도 세력에 우열이 있게 마련이다.문중의 지반이 약한 승려는「建幢」이라 하여 때론 스승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인연을 맺은 스승과 제자는 父子의 관계가 되고나아가 손자.증손,그리고 사촌 등 방계를 이뤄 하나의 문중을 이루게 된다.
불교계의 문중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60년대 들어서부터다.조계종이 비구.대처의 통합종단으로 출범한 62년 이후 종단의 내분이 표출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을 문중의 宗權다툼으로 풀이했다.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난 90 년의 총무원장선거와 李性徹종정의 임기만료에 따른 후임종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도 문중싸움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徐총무원장의 재선을 두고 일어난 문중간의 갈등은 뒤이어 선출될 종정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徐총무원장은 재선을 위해 이른바 梵魚문중의 지지를 획득,당시 德崇문중을 기반으로 입후보한 柳月誕종회의원(법주사주지)을 가볍게 물리쳤다.초반 의 예상은 양측의 문중표를 보아 팽팽한 접전으로 보였다.그러나 결과는 徐총무원장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당시 말좋아하는 이들은 덕숭문중에서 반란표가 나왔다고 분석했다.다시 말해 개인의 이해가 문중의 이해를 뛰어넘었다고 했다.
李性徹종정의 임기만료에 따른 후임종정 선출은 본격적으로 문중싸움이 됐다.8.15해방이후 정화운동의 양대산맥으로 조계종의 핵심을 이루어온 덕숭문중은 한번도 종정을 배출하지 못했다.그 恨(?)을 풀기 위해 당시 원로회의 의장이자 불국 사조실인 崔月山스님을 종정후보로 내세워 물밑 작업을 펴나갔다.
88년 개정된 종헌에 따라 종정은「종정추대위원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李종정의 임기만료(91년1월9일)후 4개월이 되도록 위원회를 열지 못했다.그해 佛誕日은 종정의 법어 없이 지나갔고 뒤늦은 여름에 들어 결국 원로회의(의 장 송서암)에서 李종정이 종정에 재추대됐다.
당시 원로회의 의원은 범어문중이 7명,덕숭문중이 5명,직지사.통도사 각 2명,백양사.송광사가 각 1명,徐총무원장의 영향력이 있는 교구에서 3명 등 모두 21명으로 구성돼 있었다.따라서 이니셔티브는 徐총무원장이 쥐고 있었다.
한마디로 문중의 이해 관계를 잘 이용한(?)사람이 徐총무원장이었다.그는 어느 문중에서도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고 慈雲스님(범어문중)에게서 비구계를 받았기 때문에 친범어계로 치부해 왔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1천6백년의 역사를지닌 한국불교에서 문중의식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왜냐하면 문중이 없다는 것은 법맥이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늘날 흔히 말하는 범어문중이니,덕숭 문중이니 하는표현은 최근에 나온 말이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으로 불교의 법맥이 일시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다.그것이 되살아난 때가 19세기말 20세기초다.한국 禪의 중흥조로 불리는 鏡虛선사(1849~1912)를 시작으로 일제하에 들어가면서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배출된다.
경허의 제자인 滿空(1871~1946)과 慧月(1826~1939),33인의 한 사람이자 대각사를 세우고 오늘날 범어(혹은용성)문중의 시조가 된 龍城(1864~1940), 漢永(1870~1949).卍海(1879~1944).漢岩(1 876~1951).曉峰(1888~1966).東山(1890~1965).鏡峰(1892~1982).金烏(1896~1966)에 이어 靑潭(1902~1971).古庵(1899~1988).西翁(1912~).性徹(1912~1993)스님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태어나 활동했다. 현재의 문중의식은 바로 이들 선사들의 제자들이 해방후 비구.대처승 사이의 이른바「淨化佛事」를 일으킨 뒤 각 교구본사를관할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그 뒤 오늘날의 조계종단이 확립되면서 문중의식은 종권을 둘러싼 파벌싸움의 양상마저 띠게 됐다. 적어도 일제하 왜색불교로부터 정통 한국불교를 되찾기 위한 노력에서는 내스승 네스승이 따로 없었다.천리길을 마다않고 훌륭한 스승을 찾아 산문을 자유로이 드나들었고 서로 협력을 아끼지않았다.일제하 법관 자리를 박차고 늦깎이로 출가한 효봉스님은 오늘날 송광사를 중심한 효봉문중의 시조가 된 셈이지만 만공이나용성스님을 은사로 모셨다.더구나 50년대 「정화불사」시절에는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어 비구승의 입지를 마련했다.
이쯤에서 우리는 현재 조계종의 문중의식을 형성한 법맥의 일부를 더듬어보기 위해 조계종의 조직을 살펴보자.조계종은 일제하 31本山 제도를 답습해 지역별 敎區制를 실시,총무원 직할교구(제1교구)를 비롯해 모두 25개 교구본사를 두고 있다.각교구 본사는 산하에 末寺와 암자를 두고 이를 관할한다.조계종은 경허→만공→금오스님을 축으로 하는 법맥과 용성→동산으로 이어지는 다른 한축이 커다란 세를 이루고 있다.한때 금오스님의 직계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법맥을「金烏문중」( 또는 月字문중)이라고 불렀지만 90년대 들어 경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들의 근본도량인德崇山 수덕사의「덕숭」을 머리글자로 한「德崇문중」이란 용어가 새로 탄생됐다.다른 한편「梵魚문중」역시 초기에는 「東山문중」이라 부르다 뒤에 동산스님 이 주석하던 범어사와 연결시켜 범위를확대하면서 생긴 말이다.그러나 이들 역시 90년대 들어 용성문도협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지금은 「龍城문중」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이들 양대 문중 이외에 교구자치권을 누리고 있는 독립문중으로 송광사의「효봉문중」,백양사의「白坡문중」,통도사의「경봉문중」,직지사의「탄옹문중」,그리고 봉선사의「耘虛문도」를 들 수 있다. 최근 조계종의「제2정화불사」라 불린 개혁운동이 한창일때 불교계전문지인 法寶新聞은 각 교구본사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를 조사해 관심을 끌었다.당시 분류에 따르면 개혁회의 지지본사는 법주사.수덕사.금산사(이상 덕숭문중).해인사. 쌍계사.
범어사.대흥사.관음사(이상 용성문중).직지사.통도사.봉선사 등12개고 徐원장 지지 본사로는 직할교구인 조계사.월정사(덕숭문중계).마곡사.동화사.은해사.고운사(이상 총무원장영향권).백양사(백파문중)등 7개였다.
또 중립을 고수한 본사는 용주사.신흥사.불국사(이상 덕숭문중).화엄사(용성문중).선운사(총무원장영향권)등 5개로 집계됐다.이 조사에 따르면 이번 개혁운동은 표면적으론 문중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후 개혁회의의 활동 여하에 따라서는 심각한 문중의식표출도 없지 않을 것으로 불교관계자들은 내다봤다.
〈崔濚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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