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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열전>7.박정희정부 초대 총무처 이석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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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칼날」「대쪽」「대리석」-.
지난해 감사원장을 맡으면서 司正정국을 이끌던 지금의 李會昌국무총리를 일컫는 별칭들이다.
그러나 이 별칭은 朴正熙대통령의 3공화국.維新시절 6년9개월간 총무처장관과 5년동안 감사원장을 지낸 李錫濟씨(69)의 트레이드 마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요즘 별로 없는 것 같다. 5.16 주체이자 기획자로서 시종 朴대통령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李장관처럼 일생을 강직으로 보낸 공직자도 드물 것이다.
당시의「혁명」주체들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초기의 개혁의지를상실한채「자리」를 명예 이상의 致富수단으로 이용해 비난받는 인사가 적지 않았으나 李장관만은 공직에서 물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치도 이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청빈 의 외길을 걸었다. 비話한토막.
총무처 장관에 부임한지 얼마안된 63년 무렵.당시 정부는 미군에서 쓰던 폐차 직전의 군용지프를 대당 1달러씩 주고 모두 10여대를 구입해 장관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운전사가 차를 몰고 슬쩍 밖으로 사라지더라는 것.어딜 가나 하고 문밖에 나가보니 부인이 그차를 타고 나간후 1시간만에야 돌아왔다.
평생 처음 남편에게 배당된 지프가 타보고 싶었으나 남편 성격을 아는지라『타겠다』는 말은 못하고 운전사를 불러 몰래 시내를한바퀴 돌아보고 온것이었다.
문제는 다음날 발생했다.
멀쩡한 남편이 해가 中天으로 떠올라도 방안에 누워 출근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이에 부인이 궁금해『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남편 曰『오늘부터는 당신이 장관이니 당신이 출근하시오.장관차 타는 사람이 장관이지….』이후부터 부인은 한번도 그 지프를타보자는 말을 않더라고 李장관은 술회한 적이 있다.
그런 李장관이 67년 7월 朴대통령의「寸志」를 받아 집을 마련했다해서 한동안 관가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혁명이 자리를 잡아갈 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당시 주체세력들중에는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당시 주택공사 사장으로 부임한 張東雲씨가 AID차관 일부로서울용산구한남동에 20평짜리 주택을 지어 혁명동지들에게 분양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대부분 입주금 몇십만원씩이 없어 망설이고 있을 무렵 JP가 활동자금 일부를 보내와 대개는 이 돈으로 집을 마련했으나 李장관만은 돈을 돌려보내고 도봉구우이동 무허가 판자집에서 출퇴근했다.
그러나 출근 사정이 말이 아니어서 육군본부 근처에서 혼자 하숙하던중 金熙德장군의 배려로 육본관사로 하숙을 옮겼다.이 소식이 朴대통령 귀에 들어갔던지 청와대에서『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당시 朴대통령은 5백만원이라는 거금을 건네주었는데『각하가주시는 돈이니 받겠습니다』고 하자『다른 사람 돈은 안먹으면서 내가 주는 돈은 왜 먹어』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李장관은 이돈으로 집 한채를 마련했다고 한다.
李장관의 이같은 성품은 그토록 바로잡기 어렵다던 총무처의 고시제도를 정착시킨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장관실에는 국회의원들이 보낸 지역구민들의 취직 청탁서가하루에도 십수장씩 날아 들었다.의원들의 취직청탁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李장관은 부임한 뒤로 단 한件의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처음에는 노골적으로 비난도 하고 투서도 날아들고…,그렇게 한 3년 지나니까 청탁이 한건도 안들어 오더라』는 것. 金相哲 前고시과장의 회고.『지난 66년 문공부 주사로 근무하던 李장관의 처남이 사무관 승진시험에서 두번 연속 떨어졌어요.장관처남이,그것도 주무부처인 총무처장관의 처남이 승진시험에떨어진다는게 말이나 됩니까.그러나 그대로 보고하면서 「죄송합니다」고 했더니「이젠 나도 할 말이 생겼다.내 처남도 시험에 안되는데 시험이나 인사청탁이 말이 되느냐라고 하면 체면도 서게 될거다」라고요』.
사실 외곬으로 강직한 길을 걷자면 좀 우직하다는 평을 면하기는 어렵다.李장관은 요즘도 부인으로부터「老後대책」을 세우지 못한데 대해 핀잔아닌 핀잔을 듣기 일쑤라고 말한다.
李장관은 11년전부터 살아온 서울서초구방배동의 아파트(47坪)를 최근 처분하고 20평 남짓한 전세집으로 이사할 채비를 하고 있다.
다달이 나오는 공무원.군인연금외에는 달리 수입이 없는데다 그동안 모아둔 돈한푼 없이 2남3녀의 교육비로 6천여만원의 빚까지 진 상태라는 것.기세좋던 시절의 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낸 사람이 그 흔한 승용차 한대없이 빚까지 지고 산다.
李장관의 이같은 청빈성은 아무래도 일본 사무라이정신의 이해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주변사람들은 말한다.
25년 평북 삭주에서 출생,육사8기 특기로 임관한 李장관은 6.25가 한창이던 52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 이래 5.16까지 10년간 중령계급장만 달았다.「재주좋은」사람들은 뇌물에다청탁등으로 승승장구 진급을 했지만 이런 로비가 체질적으로 맞지않았다. 한달 월급이 열흘만에 떨어져 부인이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극빈상태에서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당시 李중령은 각국의 역사,그중에서도 혁명사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일본의 明治유신에서부터 프랑스혁명,나세르 중령이 주도한 이집트 혁명,이란의 쿠데타,파키스탄 아유브 칸의 쿠데타,케말 파샤의 터키혁명등의 사례와 관련자료등을 구해 탐독했다.
그중 明治유신의 핵심세력인 사무라이정신의 본질에 매료돼 깊은이해와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사무라이들은 재물에 욕심을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놀라울 정도의 충성심과 희생정신,그리고 청빈을 덕목으로 삼으며 농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때 賣官賣職에 사병들의 부식.물자빼돌리기를 예사로 하던 당시 군부의 환경은 당연히 청산의 대상이 되었음직하다. 李장관은 육군대학 교관으로 있던 50년대말『軍에서는 희망이 없다』며 고시준비를 하다 59년 육군본부로 전속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에는『부패.무능한 장군들은 물러가라』며「16인 하극상 사건」을 주도,3개월간 불구속 재판을 받기 도 했다.그러던중 JP의 소개로 당시 대구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돼 있던 朴正熙장군을 만나 혁명결의를 하기에 이른다.
***전세집 이사 채비 李장관을 평하는 사람들은 청렴.강직성과 꼼꼼하고 치밀한 일처리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주지만 인간미에서는 다소 메마른 구석도 있다고 말한다.이는 李장관이 총무처라는 드라이한(메마른)업무와 감사원장이라는 직책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처 리에 있어서는「인정사정없이」권한을 휘둘러 찬바람이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71년 감사원장에 부임해서는 수산업협동조합에 대한 감사를 실시,총무처에서 차관으로 같이 일했던 朴모 회장을 고발해 구속시킨 칼날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또 총무처장관 초기에는 수위가정문으로 걸어오던 자신을 몰라본다며 실.국장들을 소집,호통친 일도 있다는 것이다.
李장관은 새정부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은듯했다.『한국병이라고 진단했으면 환자가 알도록 어디가 아프니 어떻게 고치겠다는 처방전(비전)을 내놓아야지요.무조건 아프다고 병원에만 입원시켜 놓은 형국이 아닙니까.』 〈申東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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