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코너>러시아TV의 防彈조끼 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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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깊은밤.텔리비전화면에 남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러시아 보통 아내 얼굴이 클로스업된다.
마침내 초인종이 울리며 남편의 무사귀가를 확인한 여인은 환한웃음과 함께 남편의 와이셔츠를 벗겨준다.이때 놀랍게도 와이셔츠안으로 방탄조끼가 드러난다.
동시에『가정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방탄조끼를 사입으시라』는 멘트가 곁들여진다.
요즘 러시아에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방탄조끼 광고 장면이다. 방탄조끼 같은 별난 상품이 TV광고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은러시아의 심각한 사회불안 때문이다.
이 광고는 무차별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여기에 무방비 상태로노출된 러시아인등 현실의 심각성을 반영하고 있다.
무게도 8㎏씩 나가고 가격도 보통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준인 개당 4백~5백달러씩이나 하는 이 조끼는 M-16이나 러시아제 기관단총인 칼리시니코프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조끼는 옛소련 첨단과학의 산물인 특수강판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선전되고 있다.
워낙 품질이 좋다고 소문나 은행가를 비롯,경비용역업체는 물론마피아들에게까지 인기상품이라는 것이다.이 회사는 또 흉기공격에대비한 특수 머리보호장비도 판매하고 있다.
모두 옛소련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광고이며 현실이다.
옛소련은「광고는 불필요한 소비욕구를 촉발시키고 욕망을 왜곡시키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해악의 하나」라는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광고」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악명을 떨치긴 했지만 전체주의 정권의 엄격한 감시체제와 명령통제체제가 치안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해줬기때문에 방탄조끼 광고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89년까지만 해도 옛소련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산책을 즐기거나동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부르는등 안전한 생활을 누려왔었다. 그러나 90년이후 급격하게 이완된 사회분위기와 경찰력의 약화,국가가 사멸해버리는 미증유의 혼란등이 겹치면서 범죄가 급증했고 급기야 방탄조끼 광고가 등장할 정도로 상황이 엉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지난해 마피아의 자금대출압력등을 거부한 은행장들이 마피아가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청부살인업자들에게 살해당했다. 마피아끼리 보복살육전을 벌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시민들이 유탄에 맞아 사망했을 뿐아니라 옐친 사저 인근의 주택가에까지 폭탄테러가 있었고 크렘린 인접 건물에 수류탄이 던져지기도 했다.
마피아 등쌀에 못견딘 은행가들이 전국총회를 열어『특별기금을 제공할테니 은행가들을 보호하고 마피아들과의 전쟁에 나설 수있는치안조직을 결성해달라』고 옐친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요구했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잇따른 대형 청부살인 사건,총기를 이용한 현금강탈사건등이 늘고 있어 마피아에 대한 공포뿐아니라 치안부재상황은 더욱 악화돼가고 있을 뿐이다.
올들어 3월에는 무장마피아가 은행 현금수송단을 습격,대낮에 70만달러를 강탈해갔고 4월에는 러시아 최강 마피아의 두목이 전문 총잡이의 손에 살해됐다.
대형사건만 아니라 치기배들도 증가,서민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 들어 보수파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급성장해가고 옛소련에 대한 향수가 깊어져 가는 것은 서민들을 위협하는 치안 부재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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