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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드릴 말은 울음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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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10면

편지를 띄울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우체국은 당신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젠 만날 수 없는 아버지께

아버지께

아주 낯선 아이가 당신 품에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도 낯섭니다. 지금의 저보다 젊은 당신.
아버지 옆에 20대 여인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섰습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의 한구석에 흰 붓글씨로 ‘1974년 해운대 해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진 속 낯선 아이는 두 살짜리 제 모습이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이 모습이 너와의 마지막 기억이 될 것 같아 일부러 사진사를 불러 찍었다.”
어릴 적 제가 많이 아팠다지요.
두 살짜리 꼬마의 배를 갈라 장을 들어내고 다시 이어 붙여야 하는 수술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지요.
어린 자식을 수술대에 눕혀 보내기 전 당신은 아득한 눈길로 절 안았습니다.
30여 년 전… 지금의 저보다 젊었던 당신은 저를 구했는데,
지금의 저는,
당신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지금 저 세상, 먼 나라에 계십니다.

당신께서 마지막 숨을 고르셨을 때 저는 동부간선도로 퇴근길 정체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전날 뵙던 모습이 힘들어 보여 댁으로 향하던 참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길은 이리도 막혀 더딘데, 저 세상으로 가시는 길은 그리도 빨랐나 봅니다.
오랜 세월 앓으시며 고비고비 잘 넘기셨는데,
그날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께선 7년간 지병으로 투병하셨습니다.
그간 여덟 차례 입원하셨고 마지막 아홉 번째는 영안실로 모셔야만 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의식을 잃다 깨어나고 다시 기력을 되찾으시는 일을 반복하셨는데, 아버지, 그 마지막엔 의식 없이, 말씀 없이, 그렇게 지친 듯 조용히 가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일 생각나세요?
진작부터 하시던 사업이 몇 년째 꼬이고 당신 삶이 팍팍했던 때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앞에서 4인용 테이블 열 개가 못 들어차는 식당을 내셨지요.
당신은 직접 ‘철가방’을 들고 동네 복덕방으로, 학원으로, 사무실로 배달을 다니셨습니다.
제 학교로도 배달을 오셨습니다.
눈이 녹아가던 계절이었습니다.
교문 앞 언덕길 질척한 눈길에 오토바이 바퀴는 계속 헛돌고, 돌솥비빔밥이랑 우동이랑 음식이 가득 들었을 철가방이 기우뚱했습니다.
하굣길에 쏟아져 나온 학생들 사이에서 당신이 버둥거렸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학교 앞 식당 아저씨가 아버지란 것은 제 친한 몇몇 친구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머뭇거렸습니다. 그렇지만 달려갔습니다.
미끄러져 음식을 쏟고 넘어질 듯한 오토바이를 제가 뒤에서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절 외면했습니다. “넌 모른 척하고 그냥 가라!”
아버지, 기억나세요? 다가선 제게 당신은 귓속말로 짧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제게 화를 내신 겁니다.
당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잠시나마 머뭇거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입관을 위해 영안실 금속제 침대 위에 눕혀진 당신의 몸은 차가웠습니다.
차고, 습하고, 단단했습니다. 그제야 당신이 그 육신 안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리를 묶고 종이 신발을 신기고 세 겹 삼베옷으로 당신을 감싸고, 이제 아버지는 관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어머니는 내내 오열하셨습니다. “미안해요. 당신 딴에는 살아보려고 바둥댔던 건데 이해 못하고 화를 내고, 싸우고, 그래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젠 아프지 말고 편히 쉬세요. 저세상 가서 이젠 아프지 말고… 고생 많이 했어요. 미안해요.”
주저앉는 어머니를 부축한 저는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쏟아지는 눈물 속으로 시선이 잠겼습니다.
아버지, 당신 뜻대로 벽제 화장장에 모셨습니다.
점화를 알리는 등이 켜지고 당신은 불길 속으로 영영 사라졌습니다.
할머니 장례 때도 보셨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유족 앞에 유골을 보입니다.
당신의 육신이 타버린 뼛조각 속에 길이 20㎝가 넘는 굵은 철심이 남았습니다.
장례식장 직원은 그 쇳덩이를 골라 내 바로 옆 상자에 텅 소리 나게 던졌습니다.
지난해 가을, 이번엔 어머니가 심장수술 때문에 입원하셔서 아버지 혼자 집에 계셨을 때, 쇠약한 몸으로 무리하게 거동하시다 쓰러지셨죠?
그때 부러진 뼈를 맞춘다고 수술로 박아넣은 철심입니다.
그 수술도 힘들게 버티셨는데 결국 박아넣은 철심으로 다시 한번 일어나지도 못하신 채, 공연히 그 무거운 쇳덩이를 품고 저세상으로 가셨네요.

오랜 세월 저는 눈물을 모르고 지냈던 모양입니다.
흐느끼며 주저앉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울었습니다.
눈물이 그렇게 짠 것인지, 그렇게 맵고 따가운 것인지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말은 울음이었습니다.
울음만이 당신께 드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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