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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39.前 여성의전화 원장 김희선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미혼여성의 근로기간은 55세까지로 봐야 한다』는 서울고법의항소심판결이 내려진 86년 3월4일은 한국 여성운동史에 오래도록 기억될 날이다.
83년 교통사고를 당한 여성근로자가 개인택시 차주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에서 사법부가『미혼 여성의 정년은 25세』라고 판결을 내리자 이에 반발한 여성계는 똘똘 뭉쳐 치열한투쟁에 나섰고 이날 결국 승리를 얻어낸것.
당시「25세여성조기정년철폐를 위한 여성단체연합회」를 구성,사법부의 판결을 바로잡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여성의 전화」원장 金希宣씨(51).
이후 재야 운동가로 활동하며 92년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을 맡는등「통일아줌마」로 더 잘 알려진 金씨가 최근 서울강남구신사동에서「향나무집」이란 전통음식점을 차리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제가 음식점을 한다니까 이젠 통일운동 안하는줄 알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하지만 아직도 여성.통일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金씨는 자신의 변신을『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물적토대를 마련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평범한 주부였던 金씨가 본격적인 여성운동에 나선 것은 83년「여성의 전화」를 창립하면서.
「매맞는 아내들의 친정엄마」역을 자임하며「성폭력」등 여성인권문제를 최초로 사회문제화했고 여성조기정년제를 철폐시켰다.
여성운동가 金씨는 86년7월 수배중이던 장기표씨를 숨겨줬다는이유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면서 재야 운동가로 거듭난다.
87년 대선때엔 공명선거 감시단을 이끌다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사건에 연루돼 두번째 옥고를 겪기도 했다.
그후 金씨는 범민족연합 결성을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에 수배돼지난해 10월「6共정치수배자 수배해제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2년10개월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金씨는 이때『수배가 풀리면 4~5개월안에 일터를 찾기로 다짐했었다』고 말한다.
『제가 수배당한 직후 오랜 세월 재정적 후원자였던 남편(53)이 안기부에 의해 사업체를 빼앗겼어요.3년간의 수배생활중 많은 분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습니다만 재야운동의 방향이 불투명한 지금같은 상황에선 더이상 다른 분■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생각해요.』 현재는 범민련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金씨는 어렵게 만들어진 남북합의서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남북합의서엔 당시 재야가 주장했던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지금이라도 남북합의서 내용을 전국민에게 알리고 남북이 준수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재야의 통일운동에앞장서왔던 金씨는 이제 재야운동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재야가 이뤄낸 통일운동의 성과는 평가받아야겠지요.그렇지만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그것이 새로운 재야운동의 출발점입니다.』 재야운동은 이제 대중적인 정치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金씨는 따라서『재야도 제도권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최근 재야인사의 여권참여에도 긍정적이다.
『제도권의 영역이 넓어져 국민적 기대가 확산돼 있는 지금의 상황에선 제도권안에서도 자주와 통일은 1백% 가능하다고 봅니다.』 너무 사업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 시간나는 대로 강연.글쓰기를 계속하겠다는 金씨는『혼란기인 지금의 재야가 안정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지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李相列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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