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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진경<秦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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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시황이 중국 최초 통일 제국의 권세를 누리던 현재 산시(陝西)성 소재 함양궁과 아방궁이 무대다.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폭정으로 단명에 그친 진 왕조의 끝은 스산했다.

그 왕궁이 한(漢) 고조 유방(劉邦)에 의해 점령되던 날. 군대를 지휘한 핵심 참모 소하(蕭何)는 유방에게 “일단 왕궁 전체를 봉쇄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한다. 그 안에 들어 있을 무수한 보물을 건지기 위함이다. 소하가 먼저 압수에 나선 것은 진 왕실이 보존했던 각종 서적이다. 그 다음으로 찾아 나선 것은 진시황이 가지고 있다던 큰 거울, 즉 ‘진경(秦鏡)’이다.

이게 참 묘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사람의 모습이 거꾸로 선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요술 거울’이다. 더 신기한 것은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으면 사람의 오장육부가 모두 비친다. 매우 선명하게 들여다 보여 조그마한 움직임까지 관찰할 수 있다.

진경은 몸속의 질병과 마음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요술 거울에 뢴트겐이 발견한 X선 기능, 나아가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었다니 그 가치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진 왕궁의 전적과 함께 이를 찾아내기 위해 부심했던 소하의 의도가 읽혀진다.

그러나 진시황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을 골라내는 데만 이 거울을 썼다. 시황의 아들 대에 가서는 이 진귀한 보물의 가치는 아예 잊힌다. 이 때문에 짧은 영화를 끝으로 망해버렸고, 거울을 확보한 덕인지 한 왕실은 자못 길게 버텼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지금까지 내려온 전설의 내용이다.

이 진경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몇 사람의 태도 때문이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구속을 전후해 거듭된 거짓말로 비난받았던 이택순 경찰청장. 급기야 그는 자신의 처신을 비판한 부하 총경에 대해 징계한다고 나섰다. 여론 전체가 그를 비난하는 데도 아랑곳 없는 그의 속은 얼마나 꼬여 있다는 얘긴가.

사실 이런 진경이 존재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오래 구전되는 것은 그곳에 등장하는 ‘거울’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거울은 나를 비추는 기물이다. 거울로 남을 비춰 잘잘못을 드러내기에 앞서 스스로를 비추는 게 순서다. 제 부하의 잘못을 가려 벌 주기에 나선 이 청장에겐 먼저 본인의 과오와 처신을 돌아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여론이라는 명경(明鏡)을 무시하고 그를 감싸기만 하는 청와대도 이참에 거울 앞에 설 일이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