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뮤지컬 ‘해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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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국에서 창작 뮤지컬을, 그것도 대형으로 만든다는 건 비즈니스가 아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돈 되는 구조가 아직은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창작 인프라는 미성숙하고, 제작 여건은 열악하며, 극장 구조는 폐쇄적이다. ‘뮤지컬 빅뱅’을 떠들지만 여전히 장사되는 건 ‘캣츠’ ‘맘마미아’ ‘미스사이공’ 같은 수입 뮤지컬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형 창작 뮤지컬 제작에 뛰어드는 건 순수한 열정이긴 해도 무모한 도전일뿐이다.

이런 ‘계란으로 바위치는’ 현실에 드라마 주몽의 ‘해모수’로 상종가를 친 배우 허준호(43)씨도 몸을 던졌다. 작고하신 아버님의 성함을 따, ‘장강 엔터테인먼트’를 차리고 최근 30억원 규모의 뮤지컬 ‘해어화’(解語花·사진)를 올렸다. 두번이나 개막을 연기하는 등 예상대로 험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뮤지컬 제작자로서의 첫 발을 안정적인 ‘라이선스’가 아닌 우직하지만 정면 승부를 택한 용기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품 역시 초연으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과 권력, 복수와 배신 등 극적 구조는 충만하다. 빠른 장면 전환은 작품의 속도감을, 회전 무대와 입체감있는 세트는 세련함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한국 뮤지컬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다. 노래는 스토리와 맞물리지 못한 채 ‘사건은 연기로-심리는 노래로’라는 뻔한 구조를 답습한다. 이건 결코 뮤지컬이 아닌 연극에 노래를 가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 스토리는 너무 장황하다. 역적에 몰린 딸이 있다. 그는 간신히 도망나와 몸종과 함께 예기원이란 기생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귀족 자제와 사랑에 빠지나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집안의 아들이다. 그에겐 친구가 있어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몸종 역시 자아를 찾아 또다른 애정 전선을 이룬다. 귀족 자제는 혁명을 꿈꾸어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려하나, 하나 뿐인 친구가 오히려 그의 뒤통수를 친다 등. 10권짜리 대하 소설은 족히 되는 스토리를 2시간30분 남짓한 뮤지컬로 옮기려니 숨이 턱 차오를 수 밖에 없다. 갈등과 디테일은 거세된 채 자극적인 사건의 나열은 드라마가 아닌 ‘게임’일 뿐이다.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할수록 명품의 숨결은 깊어진다. ‘선택과 집중’은 어디서나 주효한 덕목이다. ‘해어화’의 순수한 열정이 과도한 의욕을 제어해 또 다른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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