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 함께 가자 약속한 금강산 홀로 간 레나테 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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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테 홍이 1박2일 일정으로 남편이 사는 북한 땅 금강산을 방문했다.금강산 구룡연으로 오르던 레나테 홍이 독일에서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회상에 잠겨 있다. [사진=고성, 금강산=최승식·변선구 기자]

"이 길을 달려오기 위해 46년을 기다려 왔는데…" 레나테 홍 할머니는 넋이 나간 듯 말을 잇지 못했다. 26일 오전 8시 강원도 고성. 방한 엿새째를 맞아 금강산 관광길에 오른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남측 출입 수속을 마친 뒤 버스에 탑승한 할머니는 "이럴 수가…"라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불과 20분 만에 비무장지대를 거쳐 북한 땅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남편 홍옥근이 신이 나서 자랑하던 금강산을 보게 되다니…"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믿을 수가 없어…." 입술이 바짝 마른 듯 목소리마저 생기를 잃고 갈라졌다. 한동안 창밖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모습이었다. 마치 북한의 모든 풍경을 마음 속에 퍼담아 두려는 듯했다. 북측 출입 수속을 마치고 나서야 할머니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는 이번 한국 방문을 하루 앞둔 19일 꿈을 꿨다고 했다. "꿈 속에서 금강산에 와있는 거예요. 남편과 연애할 때였어요. 그는 고향 얘기를 할 때면 꼭 금강산 얘기를 했어요. 귀국하면 꼭 함께 가보자고 했지요. 그래서 옛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금강산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요."

할머니의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그는 "금강산에 오니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북받쳐 오른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레나테 할머니의 금강산 방문은 1박2일 일정이다. 첫날 구룡연과 온정각 주변을 관광하고 둘째날에는 삼일포와 해금강 관광에 나선다. 할머니는 "지도를 살펴보니 남편이 살고 있는 함흥이 금강산에서 멀지 않다"며 "혹시 동해안에서 망원경으로 함흥이 보이느냐"고 묻기도 해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또 "이번에 금강산에 왔으니 조만간 남편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더 커졌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26일 레나테 홍이 금강산으로 출발하기 위해 고성 남측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수속을 하고 있다. [고성, 금강산=최승식·변선구 기자]

앞서 전날 레나테 할머니는 이화여고 초청으로 류관순기념관에서 학생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학생 1000여 명이 뜨거운 박수로 환영하자 모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레나테 할머니는 "나도 화학교사로 10여 년간 근무한 적이 있어 학교에 오니 마치 고향에 들른 것 같다"고 친근감을 보였다. 그는 또 "내 사연을 듣고 한국에서 많은 분이 공감을 해주어 감사하다"며 "부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계속 성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금강산=유권하 기자
사진=최승식·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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