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레나테 홍 할머니의 눈물 왜 못 닦아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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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동양인 남자와 부부로 맺어진 정을 잊지 못해 46년을 수절하며 살아온 벽안(碧眼)의 서양 여성. 사랑의 결실로 얻은 두 아들을 혼자서 키우며 북한으로 돌아간 유학생 남편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을 견뎌온 독일 여성. 칠순의 할머니가 된 지금도 “사랑하는 남편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며 눈물짓는 순애보의 주인공. 한국을 방문 중인 레나테 홍(70) 할머니의 애절한 사연이다.

본지 보도를 통해 처음 알려진 레나테 할머니의 사연은 소설보다 극적이다. 할머니는 1955년 동독으로 유학 온 홍옥근(73)씨와 예나대 신입생 환영 파티에서 만나 4년여의 열애 끝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첫아이를 낳고,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북한의 동유럽 유학생 소환 조치 때문에 61년 남편과 생이별했다. 그 뒤 편지를 통해 남편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몇 년 뒤 이마저 끊겨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다 올 초 한국과 독일 적십자사의 도움으로 남편이 학자로 일하다 은퇴해 함흥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의 기막힌 삶을 살아온 레나테 할머니의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재혼한 남편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저 한 번 만나 지나온 세월에 대해 서로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또 장성한 두 아들의 얼굴을 아버지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까지 보냈다.

레나테 할머니의 사연은 이념 문제도, 체제 문제도, 정치 문제도 아니다. 인륜과 인간애의 문제일 뿐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독일로 오는 것이 어려우면 자신이 북한에 갈 수도 있고, 이것도 어렵다면 남북 이산가족들처럼 화상상봉이라도 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초 남북 정상이 만나는 기회에 자연스럽게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레나테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메마른 현대인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작지만 값진 인도주의의 실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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