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찾기>봄은 봄이로되 봄은 아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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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저만큼 야트막한 언덕 위로 한떼의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선생이 등을 돌린 채 아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자,어린이 여러분.이쪽으로 오세요.줄맞춰서,오옳지.자,그러면…참새는?』 『짹짹!』 『부엉이?』 『뷩뷩!』 른 걸음으로는물에 만 밥 훌쩍 한 숟가락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이제 겨우부지깽이만한 아이들인지라 길을 잡아먹는 속도가 꽤나 느렸다.그동안 부리 달리고 입 달린 온갖 새며 곤충,짐승들이 다 나왔다.까치,매미,호랑이,고양이,염소 등등.마침내 지네 발만큼 많은아이들이 푸른농원 어귀까지 진격해왔다.
소댕이영감은 쥐불을 놓아 까맣게 탄 논 복판에서 마지막 담배개비를 맛있게 태우고 난 참이었다.
『저,할아버지.』 『응?나 말이여?』 『그럼 여기 할아버지 말구 누가 또 있어요,호호.』 안경잡이 여선생은 논두렁에 서서무엇이 우스운지 손으로 입까지 가리며 호호 웃었다.
흥,우스울 일도 많다.그리고,가리려면 그 놈의 허벅지나 가릴게지,쯔쯧.
아닌게 아니라 여선생의 짧은 치마 아래로 총각무처럼 허연 맨다리가 아까부터 소댕이영감의 눈을 시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가 푸른농원 맞죠?』 『보면 몰러?눈두 나보담 두 개나더 많으면서?』 『네?호호,할아버지 농담두 잘 하셔.』 『색시랑 농담하자구 여는 게 아녀.빨랑 들어가 봐.푸른농원 박회장 나으리가 눈 빠져라 지댈리구 있을 텡께,흥.』 『호호,괜히 심술이셔.할아버지,여기 사람들 많이 찾아오죠?』 『나보러 찾아오는 건 아니지,흥.』 『어머,섭섭하셨나 봐.』 저,저런 말본새하구설랑은,쯧! 소댕이영감은 마흔이 넘도록 장가는커녕 선 한번변변히 보지 못하는 제 자식놈 춘삼이가 아무리 급하다 해도 저런 처자한테는 내줄 수 없노라,속으로 옹심을 한번 부리는데.
『선생님!』 하고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어 외친다.
『뭐죠?』 『선생님,이게 뭐예요?』 순간,소댕이영감은 제 눈을 의심했다.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분명 소댕이영감 제가 서 있는 논이기 때문이었다.세상에!언제적인가,도시것들이 벼를 일러 쌀나무라고 말했다더니,이제는 한술 더떠 이게 뭐냐구? 『글세,뭘까요?신기한데,우리 할아버지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네…넷!』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할아버지,이게 뭐지요?』 『이게 뭐,뭐냐구?너희들 놀이터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논바닥으로 뛰어들어왔다.소댕이영감은 똥 씹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그때 마침 푸른농원 박동팔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구,벌써 오셨군요.이거,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에요.마침 아이들에게 좋은 공부를 시키고 있는 중이거든요.』 『공부?』 『아이들이 자연놀이터에서 저렇게 신나게 뛰어놀잖아요.』『하하,그렇군요.사실,그래서 저희 농원에서두 저 논을 사들일까하는 중인데…….』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자라나는 아이들한테 자연의 고마움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두.』 자연의 고마움?흥!소댕이영감은 여선생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치더라도,힐끔힐끔 자기를 훔쳐보며 번연히 알면서 안되는 소리로 되받는 박동팔이 백배 천배 괘씸했다.
요즘 들어 박동팔의 발걸음이 부쩍 잦아진 게 사실이었다.물론소댕이영감 자기 앞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그렇지 않아도 농사일에 흥미를 잃고 있는 아들만 읍내 다방이다,자기네 농원 번지르르한 응접실이다 하는 데로 꾀어내어 쏙닥쏙닥 온갖 그럴싸한 말로 들쑤셔 놓았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얼마 전 선진농업시찰단에 끼어들어 일본에 다녀온 뒤로는 이 참에 아예 일을 마무리하자고 덤벼드는 것이었다.말 끝마다 일본에서는,이었다.일본에서는 우루과이가 오히려 전화위복이에요.일본에서는 양이 아니라 품질로 겨루는 농사가 성공했지요.일본에서는 힘들이고 하는 농업에서 힘 하나 안들이고 하는 농업으로……하지만 요지인즉슨 처음 이야기에서 하나도덧붙일 게 없었다.우루과이협상이 타결되기 훨씬 전에 재빠르게 제 논을 밭으로 갈아엎더니 거기에 떡하니 간판을 갖다붙이길,「무공해 관광농업 푸른농업」이었다.
그때부터 온갖 이름도 요상하기 짝이 없는 작목만 골라 심기 시작하는데,소댕이영감 눈에는 그것이 그야말로 파릇푸릇 눈요기감이지 도무지 농사짓는다고 말할 만한 것은 못 되었다.그래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코웃음친 것이 바로 소댕이영감이 었다.하지만한 해 농사를 결산하고 나서는 사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우루과이고 뭐고 해오던대로 쌀농사를 지은 집에서는 추곡수매장에서 한숨에 울화통만 터뜨리고 돌아섰는데,박동팔이는 나락농사 한 톨 짓지 않고도 구린 돈 냄새깨나 맡았다 .
사람들이 놀라 물었다.
『나락농사 짓지 않구두 그렇게 돈을 만져?』 『웬걸.나락농사짓지 않았으니 돈을 만지지요.』 『딴은……허.』 렇게 올 겨울아직 얼음이 빡빡할 때부터 온통 논을 갈아엎는 불도저소리가 요란했다.해서,이제 마을에는 딱 한 집 소댕이영감네 논만 남고 말았다.몇 집은 아예 땅을 팔고 서울로 떴는데,그 땅들은 박동팔이 선진농업후계자로 나라에서 융자 까지 받아 몽땅 거둬들였다. 당연히 소댕이영감네가 마지막 목표가 되었다.박동팔은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땅을 팔라고 졸라댔다.소댕이영감네 땅이 푸른농원을 좌우 중턱에서 훌쩍 갉아먹은 꼴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처음,소댕이영감은 박동팔이 말만 잘했어도 못 이 기는 척 포기하고 말았을 터였다.냄새나는 제 빤쓰 하나 빨아줄 색시를 구하지 못해 꼬부랑할머니 제 어미의 손을 빌리는 외아들 춘삼이를 봐서라도 두 눈 딱 감고 도장을 찍었을지 몰랐다.하지만 뭐그 논을 깔아뭉개서 시원하게 주차장을 내겠다고?… 그게 꼭 먹고 살 만하니까 조강지처 버린다는 소리로 들렸다.소댕이영감은 그 말에 그만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아무리 기업농이 어쩌구 저쩌구 해도 수천년 이어 온 나락농사를 하루 아침에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칠 수 있는가.어 쨌거나 그 뒤론 두번 다시 말도 못붙이게 했는데,이제 그 박동팔이 다시금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춘삼이는 오늘 아침에도 제 아버지 들으라고뼈 아픈 한 마디를 던지지 않았던가.
『누구는 양복입구설랑 농살 져두 돈방석에 앉았다는데,누구는 샅 사이에서 요령 소리 나도록 뛰어댕겨두 맨날 이 모양 이 꼴이니….』 소댕이영감의 가슴은 문 닫아걸고 신문지를 태운 것처럼 꽉꽉하기만 했다.
***이 윽고 박동팔은 대처에서 한바탕 뛰는 유치원 아이들을이끌고 둥근 간판이 멋들어진 푸른농원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더 버틸 거유,하는 투의 박동팔의 미소만 뒤에 남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소댕이영감이 더는 논에 머무를 마음이 없어져서 어슬렁 걸음을 옮기는데,마침 구장이 푸른농원에서 뒷짐을 진 채 나왔다.그는 진작 제 논을 다 팔고 푸른농원에서이른바 농사지도교사로 월급을 타먹고 있었다.주말이 며 방학때 자가용을 끌고 와 돈 내고 농사를 짓는(푸른농원쪽에서 보자면 지어주는)도시사람들에게 씨는 이렇게 뿌려라,김은 이렇게 매라,뽑을 땐 이렇게 뽑아라,하면서 설겅설겅 말품만 팔면 다달이 돈이 나오는 해괴한 직업이었다.소댕이영감 은 귀신 조화속 같은 푸른농원의 그런 농사에 앞장서서 뛰어든 구장이 얄밉기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이제 와서는 무어라 탓할 건덕지도 없었다.
『왜 또 똥 씹는 얼굴이야?』 『왜는 왜,자네 상전 아니면 내가 이러겠어?』 『회장이 뭐랬어?』 『뭐라긴,그냥 웃고 갔지.병아리 같은 아이들 데리고….』 『아이들? 아,그 애들 참 똑똑하대.온실 안에 있는 것들을 다 꿰어맞히거든? 케일.멜런.
바나나.셀러리.파슬리.자몽.키위.레먼.피망.브로콜리.레터스….
』 왜 호박.가지는 못 맞혀,하고 말하려다가 소댕이영감은 그럴기운마저 잃었다.
『담배나 줘.』 『담배? 자네 아나? 담뱃값을 매기는 게 누군지?』 『누군 누구야,관리들이.』 『관리들? 우리나라?』 『이 사람,보청기를 끼구두 이래?』 『흥,천만에! 이러니 자네는천상 구닥다리 신셀 못 벗어나는 거야.박물관에 가도 싸지,싸.
』 『뭐? 그럼 누구야,대체?』 『관리는 관린데 그게 미국사람관리라네.』 『뭐?』 『우리나라 담배가 왜 2백원짜리에서 껑충건너뛰어 7백원짜리로 가느냐 하면,그게 바루 미국 사람들하구 담배 협상을 벌인 끝에 그렇게 결정난 거라네.관세가 어쨌다나 저쨌대나?』 『뭐?』 『놀랄 것 하나 없지.국제화니깐두루.어때,담배 한 대 피울라나?』 『관둬! 나,이제 담배 안 피워!』일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소 댕이영감은 그날부로 진짜 담배를 끊었다.나라에서도 사정이야 없겠느냐만,제 나라 담뱃값조차 딴 나라하고 협상해서 매기는 판국이라면 농사는 애시당초 물 건너 간 소리에 불과했다.이러다간 무엇을 또 개방하자고 나서지 않을 텐지.그려,이참 에 아주 허여멀건한 미국 처자들이나 덤프트럭으루 휑하니 싣고 와,불쌍한 우리 아들놈 장가나 가게! 아나,또? 내가 죽기 전에 국제화된 손주 재롱도 보게 될지….며칠 뒤,아직 개구리란 놈이 나왔다간 놀라 도로 들어갈 만큼 매운 바람이 부는데,예부터 고래실로 소문난 소댕이영감의 논에는 불도저가 신나게 누비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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