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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多문화주의가 흔들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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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09면

조지아주 돌턴에 있는 론 초등학교 학생들이 ‘충성의 맹세’(“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신의 보호 아래 나누어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정의를 베푸는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합니다.”)를 하고 있다. 이 학교는 학생 중 70% 이상이 히스패닉 계통이다. [AP=본사특약]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다양성의 죽음’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하버드대 로버트 퍼트넘 교수가 6월에 발표한 논문에 대한 보도였다. 논문 제목은 ‘여럿에서 하나로: 21세기 다양성과 공동체’. 논문 내용은 미국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이 미국을 더 강하게 한다는 기존 믿음과 상충됐다. 퍼트넘 교수는 이질성이 심한 공동체일수록 투표율ㆍ자원봉사활동ㆍ기부 등 구성원의 사회 참여가 저조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美 히스패닉 파워에 백인들 거부감

또한 자신과 인종이 같건 다르건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도 발견됐다. 반면 동질성이 높은 공동체일수록 시민활동이 활발했다. 연구 결과는 믿을 만했다. 퍼트넘 교수는 미국인구조사국과 협조해 41개 지역사회에 사는 3만 명을 인터뷰했다.

대표적 우익 논객 중 한 사람인 팻 뷰캐넌 등 보수주의자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특히 퍼트넘 교수가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연구의 이용가치는 더욱 높았다. 뷰캐넌은 “미국은 불법이건 합법이건 모든 이민을 중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1993년 “문화다원주의가 영미(英美) 전통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라고 비난했던 인물이다.

퍼트넘의 논문은 다문화주의를 흔드는 일련의 흐름에 속한다. 2006년 4월 뉴욕 타임스(NYT)는 ‘다문화주의의 사망’이라는 글을 실었다. 정보화 시대의 신흥 지배 엘리트인 보보스(Bobos) 개념을 제시한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썼다. 그는 민주당이 재집권하려면 다문화주의를 매개로 소수계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을 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4년에는 문명충돌론으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우리는 누구인가: 국가 정체성에 대한 21세기의 도전』에서 미국의 정체성 상실을 우려했다. 특히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을 경계하며 다문화주의의 결과로 미국은 붕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2002년 11월 에인 랜드 연구소는 뉴스레터 특집에서 다문화주의란 서구문화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인종주의라고 공격했다. 이같이 다문화주의에 도전하는 글들은 2001년 9·11 이후 진행된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반영한다. 내부적 단결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염원도 담겨 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민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직결돼 있다. 지난 6월 28일 1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국 내 불법 체류자들에게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려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민개혁안이 좌절됐다. 상원이 이민개혁법안을 반대 53 대 찬성 46으로 부결했다. 그 과정에서 미 상원의 전화가 불통됐다. 반(反)이민 활동가들이 개혁안에 반대하는 항의ㆍ경고성 전화를 거는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문제는 급증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백인들의 거부감이다. 미국인구조사국에 따르면 1970년에 외국 국적 출신의 미국 인구는 1000만 명이었으나 2000년에는 2800만 명이 됐다. 그중 3분의 2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출신 히스패닉이다. 현재 불법 이민자 수는 1200만 명 이상이며 역시 그중 80% 이상이 중남미 출신이다. 2050년이 되면 백인 인구가 현재의 69.4%에서 50.1%로 줄어들 전망이다. 반대로 히스패닉은 12.6%에서 24.4%로 늘어난다. 현재도 미국 카운티 가운데 백인이 소수인 곳이 10%나 된다.

결국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많은 주류 백인들은 ‘히스패닉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동화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라고 느낀다.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미국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히스패닉 문화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에는 이민법을 개정해 불법 이민자를 돕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려고 하자 대규모 시위사태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특히 4월 10일에는 102개 도시에서 10만~50만 명에 달하는 반대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스페인어로 “노소트로스 소모스 아메리카(우리가 곧 미국이다)”라고 외쳤다. ‘1492년 이후 미 대륙에 온 유럽인들은 모두 불법 이민자’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멕시코 국기와 체 게바라(쿠바 혁명의 영웅) 사진을 흔들기도 했다.

백인들로서는 의구심이 들 만했다. “저들은 미국 사람인가 멕시코 사람인가?” 주류 미국인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 중 하나는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스페인어를 계속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영어를 미국의 유일 공식 언어로 지정하자는 운동(English-only Movement)이 전개되고 있다. 현재 미국의 26개 주에서 영어를 단일 공식 언어로 지정했으나, 미국 연방정부는 공식 언어를 명시적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문화주의는 미국의 본질이자 숙명이다. 퍼트넘 교수는 자신의 논문이 악용되는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민 증가와 다양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 인종 다양성은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다이버시티잉크(DiversityInc)라는 온라인 잡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회사가 ‘다양성이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응답했다. 이민자의 유입도 불가피하다. 2000년 이후 미국 노동력 증가의 47%는 이민자 유입에 따른 것이다. 2008년 미국 대선에 출마할 후보들도 소수계 유권자들에게 구애해야 하기 때문에 반(反)다문화주의 입장에 서기 힘들다.

하버드대 명예교수인 사회학자 네이선 글레이저는 『우리는 이제 모두 다문화주의자다』(1997)에서 “다문화주의는 승리했다. 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세계인에게 해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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