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빅 초이’ 최희섭 950g짜리 배트에 슬슬 불이 붙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4호 15면

‘빅 초이’ 최희섭(28)이 KIA로 온다는 소식에 프로야구계는 꽤 시끄러웠다. 다른 팀 투수들은 대부분 전의를 불태웠다. SK 조웅천은 “최희섭을 삼진으로 잡으면 메이저리거보다 야구를 잘하는 건가?”라고 농담했다. 반면 중·고교 시절 최희섭에게 홈런을 맞아본 또래 투수들은 긴장했다. “걔는 어릴 때부터 새카맣게 날아가는 장외홈런을 쳤는데….” 최희섭은 국내 야구 데뷔를 앞두고 “한국 투수들이 메이저리그 투수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투수들은 불쾌한 가운데 긴장했다. 지금은 어떤가. 성적은 좋다. 그러나 이 거대한 사나이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다 풀린 게 아니다.

한국 ‘U턴’ 일단 합격점

최희섭은 5월 19일 잠실 두산전 만원관중(3만500명) 앞에서 데뷔했다. 무려 950g짜리 방망이를 들고 나왔다. ‘홈런왕’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가 사용하는 배트보다 100g이나 무거운 배트였다.

최희섭은 미국에 있을 때도 소문난 고집쟁이였다. 에이전트가 해마다 인스트럭터를 고용했지만 자기 방식을 고집했다. 힘이 분산되는 듯한 어퍼스윙과 임팩트 순간 골반이 들리는 스웨이 현상은 여전했다. 배트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지적에도 방망이 무게를 줄이지 않았다.

KIA 코칭스태프는 방관하기로 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출신인데…”라며 체념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최희섭은 무릎 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약했다. 한국 선수들은 빅리그 투수들에 비해 파워는 떨어져도 정교하기 때문에 최희섭이 고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최희섭은 25일 현재 34경기에 출전, 타율 2할9푼9리·4홈런·30타점을 기록했다. 풀타임을 뛰었다면 홈런을 제외한 각 부문 상위권에 해당하는 ‘괜찮은’ 성적이다. 김성근 SK 감독은 “손가락이 길고 힘이 좋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스플리터였다면 최희섭이 헛스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투수들은 공 한 개(약 7㎝)쯤 덜 떨어지지 않는가. 여기에 걸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싸가지없다는 말 듣기 싫어”

클럽하우스에서 최희섭은 누구보다 유쾌한 친구다. 그는 KIA의 ‘적통’ 광주일고 출신. 미국 시절엔 말머리에 “엄…, 에…”란 소리를 달고 다녔지만이젠 걸쭉한 남도 억양을 살려냈다.

언젠가 김종국이 푸념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팀에 꽃미남이 많았는디…, 요즘 왜 이 모양이 됐는지 모르겄네.” 6년 후배 최희섭이 맞받는다. “형님, 멀리서 찾지 마시죠.” 성적이 좋지 않아 침울하던 KIA 더그아웃에 모처럼 웃음이 터졌다.

최희섭이 광주구장에서 훈련 보조요원으로 일하는 학생들을 불러세웠다. “너희들 광주 동성중 야구부지?” 프로 선배들의 관심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신나게 “네!”라고 대답했다. 구단 직원이 지나가자 놓치지 않는다. “안 더우세요? 직원들은 반바지 입고 다니면 안 되나요?”

그는 1999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한 이후 8년여간 10종류가 넘는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최희섭은 “팀을 옮겨다니면서 쉽고 빠르게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야구만큼이나 클럽하우스 생활도 중요하다. 야구 잘해도 싸가지없다는 말은 듣기 싫다”며 웃었다.
최희섭이 KIA에 입단할 즈음 엉뚱한 소문이 퍼졌다. 지난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요미우리 이승엽이 최희섭에게 타격에 관한 조언을 해주자 “형, 저 메이저리거예요”라고 손을 저었다는 것이다. 최희섭은 “내가 승엽이 형한테 그럴 리가 있느냐. 만약 그랬다면 농담이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봉연·김성한 뒤를 잇는 거포로

최희섭을 보는 시각이 한결같을 수는 없다. 김성근 SK 감독은 지난 17~19일 광주에서 KIA와의 3연전을 치르면서 “메이저리그 홈런 더비(2005년 올스타전)까지 나갔던 선수가 저기(광주구장 1루 측 더그아웃)에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해외에서 돌아온 선수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이 러시를 이뤘던 90년대 말, 100만 달러 안팎의 계약금을 받고 고국을 떠났던 이들이다. 그들은 돌아올 때 또 한번 귀족 대우를 받는다.

최희섭도 99년 컵스로부터 120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았고, 올해 KIA로 오면서 총액 15억5000만원(계약금·연봉·옵션 포함)을 손에 넣었다. 최희섭만한 커리어를 가진 외국인 선수 연봉은 30만 달러 정도다.

최희섭이 온 뒤 KIA의 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외국인 타자 서튼은 보따리를 쌌다. 간판 타자 장성호는 제자리인 1루를 최희섭에게 양보하고 외야수로 돌았다. 데뷔전에서 왼쪽 옆구리를 다친 최희섭이 두 달 가까이 뛰지 못하자 “몸도 만들어놓지 않고 계약부터 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최희섭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KIA는 멀리 보고 최희섭을 영입했다. 80, 90년대 해태는 김봉연·김성한·한대화 등 ‘거포의 전당’이었다. 그러나 KIA로 간판을 바꿔 단 뒤로 눈에 띄는 거포가 없었다. KIA는 최희섭을 통해 ‘한’을 풀려 하고, 최희섭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는 내년을 기약했다.

“지금까지 국내 투수들에게 적응하기 위해 공을 정확히 맞히는 데 주력해 왔다. 조금씩 스윙에 파워를 싣고 있다. 내년을 더 기대해 달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