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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듯하지만 비상한 두뇌 레인맨 → 미국선 서번트 천재, 한국선 단순 자폐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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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최준(17)군이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아버지 사무실에서 판소리 수업을 받고 있다. 최군은 발달장애 2급이지만 판소리뿐 아니라 피아노·기타 등 다른 음악 분야에서도 '절대 음감'에 가까운 능력을 보인다.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초등학생 때도 좌우 구분이나 신발끈 매는 일을 힘겨워했던 다니엘 타멧(28). 그는 2004년 3월 무한대로 이어지는 원주율(π) 소수점 이하의 숫자를 2만2514개까지 암송, 이 분야 유럽신기록을 세우며 유명해졌다. '자폐 서번트'인 타멧의 자서전 '브레인맨, 천국을 만나다'가 최근 국내에 출간되면서 자폐장애인의 능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이란 타멧처럼 자폐나 정신지체와 같은 뇌 기능 손상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수학.암기.음악.미술 등 특정 영역에서 천재성을 보이는 경우를 일컫는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이었던 미국인 킴 픽도 바로 서번트다.

◆절대음감.암기력…=발달장애(자폐)를 갖고 있는 사람 중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발달장애 2급인 최준(17.서울 동성고 1년)군은 9일 서울예술대학이 주최한 '동랑청소년예술제'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당당히 겨뤄 판소리 부문 고등부 2등상을 탔다. 2002년 4월 '흥보가'에 이어, 지난해 4월엔 '춘향가' 완창도 해낸 그다. 어머니 모현선(45)씨는 "준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들은 '캐논변주곡'의 멜로디를 그대로 피아노로 옮기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 '절대음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날짜를 보고 요일을 알아맞히는 이현태(16.발달장애3급.한국육영학교 고등부 1년)군은 계산과 암기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영화 '레인맨'의 주인공처럼 100년 전의 날짜라도 바로 요일을 계산하고 각종 기념일을 암기한다. 한국육영학교 김효 교사는 "장애아 중에는 한 달치 식단, 지하철 노선도를 통째로 암기하는 학생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IQ 150 자폐도 있어=루돌프어린이사회성발달연구소의 고윤주 소장은 "실제로 IQ 150이면서 자폐장애인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폐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소통에 문제가 있거나 특정 분야에 집착하기는 해도 일상생활은 거의 혼자 힘으로 가능하다. 학교 성적도 좋기 때문에 본인은 '왕따'를 당하거나 '괴짜'로 불리며 괴로워하지만 부모들은 모르고 넘기기 쉽다.

특정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인다고 해서 모두 서번트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재능을 잘 살려주면 장애인이라고 해도 삶의 질이 바뀔 수 있다.

자폐 전문가인 예일대 의대 소아정신과 김영신 교수는 "말 그대로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서번트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자폐장애인의 경우 문제는 그 능력을 얼마나 사회성 습득 교육과 결합시켜 주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국내에는 자폐장애인의 재능을 살려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발달장애 2급 장애인의 어머니 김영선(가명)씨는 "능력 계발은커녕 어릴 땐 한 달에 수백만원씩 들여 음악.언어.놀이 치료를 받던 자폐아들도 초등학교 4학년만 넘으면 다닐 곳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한탄했다.

복지부에 등록된 자폐장애인은 2006년 12월 말 현재 1만926명.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 교수는 "자폐장애는 조기에 발견하면 얼마든지 훌륭한 사회인력으로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연구가 활발한 분야 중 하나"라며 "한국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수.김은하 기자

◆서번트=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서번트 증후군은 정식 의료 용어는 아니지만 자폐나 정신지체 등 뇌 기능 손상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이 그 장애와 대조되는 천재성이나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현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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