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27. 생존 영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55년 울릉도와 독도에서 암벽 등반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한 필자(왼쪽에서 둘째) .

 영어뿐 아니라 모든 언어는 생존 문제가 걸리면 배우는 속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내가 영어를 처음 배운 것은 서울사대부중에서다. 거기서 2학년 초까지 영어를 배운 뒤 한국전쟁 통에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만 했던 사연을 앞에서 소개했었다.

 미군을 고객으로 장사한 기간은 3년 정도다. 미군과 말이 통하지 않으면 당장 미제 물건을 사고 파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었다. 물론 고급 영어를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정확한 의사소통은 이뤄져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러니 값을 부르거나 새로운 물건을 떼어 올 때 내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더욱 기를 썼다. 먹고 살려고 영어를 써야 했던 것이다.

  피란지 대구에서 죽기 살기로 미군에게 다가가 구리반지를 팔지 못하면 우리 식구는 굶었다. 그러니 아는 영어 단어는 모두 동원해가며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야 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미군과 대화를 한 덕분에 영어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강원도 원주에 있던 1군사령부로 전기통신 분야 훈련을 받으러 갔다. 2주 코스였는데 미군이 영어로 강의를 하면 국군 장교가 통역을 해줬다. 통역이 엉망이었다. 그때뿐 아니라 1980년대까지도 국군의 핵심 통신장비는 미제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따라서 미군으로부터 기술 교육을 받지 않으면 군 통신장비를 운용하기 힘들었다. 부품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 미제를 썼다.

통역 장교가 통신기술을 몰라 제대로 통역을 하지 못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통역하듯 해서는 기술적인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아주 어렵다. 나는 대학에서 열등생이었지만 그래도 공대 출신이기 때문에 통역 장교보다 주워 들은 게 훨씬 많을 것이다. 강의를 하는 미군보다도 기본 원리에 대한 지식은 내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영어로 질문도 하고, 틀리게 통역하는 내용을 바로잡아 한국 군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자 강사는 아예 나한테 통역을 맡겼다. 교육 사흘째부터 마지막 날까지 내가 통역을 했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할 때 주저하지 않고 영어를 썼던 경험 덕이었다.

 요즘도 나는 이공계 학술 행사에서 전문적인 내용을 통역할 때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통역사를 가끔 본다. 기술적인 내용의 통역은 영어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 연수를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해외에 나가 영어 강의를 듣고, 외국인과 살아야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영어 때문에 불편했던 적은 거의 없다. 단지 고급 영어를 쓰기 위해 힘썼다. 발음도 교정하고, 영어 단어도 골라 쓰는 연습을 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영어 때문에 온통 난리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영어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살아 있는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존하기 위해 배운 영어가 오래 간다는 것을 나는 긴 해외 생활에서도 절감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