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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자가르치기운동 앞장 예비역중장 이재전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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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넓은 의미에서 軍장교는 교육자예요.책임이 막중합니다.더구나장군이라면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무한책임을느껴야 한다고 봅니다.』 예비역 중장 李在田씨(67.한자교육진흥회장)의 지론이다.
李씨는 이런 책임감 때문에 漢字가르치기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고 말했다.군시절부터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외쳐오던 그는「학자와 관료에게만 맡겨서는 아무 일도 안될 것같아」마지막 공직(성업공사사장)에서 은퇴하던 89년에 사단법인 한자교육진흥회를 설립,국한문 혼용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국제화시대의 漢字복권운동 時急』『한자는 왜 알아야 하는가』『최신한자교본』등 李씨가 펴낸 관련저서와 논문도 다수.
『우리 말의 7할이 한자어예요.그런데도 한글전용으로 다 된다고 중대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국민학교라면 적어도 漢字 1천자는 가르쳐야 합니다.또 모든 교과서도 국한문 혼용으로 만들어야지요.』 李씨는『개인적으로 국보1호는 남대문 아닌 훈민정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한글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며 한글과 한자는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두 날개」라고주장했다.
육사8기로 임관(49년)한 李씨는 정통 야전군인의 길을 걸으며 사단장.군단장.합참본부장등 요직을 거쳤다.육사동기생중 3분의1이 開戰 초에 전사한 6.25에서는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감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李씨는 78년 새까만군후배인 車智澈청와대 경호실장의 직속 하급자인 경호실 차장으로「차출」되면서 불운을 겪기 시작했다.1979년 10.26사태가터지면서 그는 합수부측 정치군인들에 의해 육군교도소 에 수감되는 횡액을 당한데 이어 같은해 12월31일 전역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강제로 예편당했다.
『전투위주의 정통군인이었다고 자부한다』는 李씨는 경호실차장에서 강제예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수난에 대해『머리에 떠올리기도싫은 불쾌한 추억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6군단장이던 75년 예하부대를 방문했다가 영관급 장교가한자를 몰라 신문사설조차 읽지 못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자가르치기 운동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군 지휘계통을 밟아 건의,사관학교.국방대학원등에서 한자를 가르치도록 하고 순한글이던전우신문을 국한문혼용으로 바꾸었다.
예편후 4년여를 쉬다가 83년에 성업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어서도 그는 4급이하 공사직원 모두에게 월1회씩 한자시험을 치르게할 정도로 극성이었다.李씨는 스스로「年富力强」하다고 자신하는 노익장이다.매일 새벽 명동성당에서 미사참배를 하 고 남산으로 운동을 다녀온뒤 서울논현동 한자교육진흥회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다.
〈盧在賢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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