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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사람>93 월드챔피언 神의손 당구王 이상천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탁…,다다다닥 타악!』 숨죽이는 탄성과 함께 하얀 상아구가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천변만화의 묘기를 부리는 당구-.고도의 두뇌를 쓰고 몸을 우아하게 움직이는 당구는 무엇보다 매너가 맨먼저 강조되는 레포츠로 손꼽힌다.
歐美에선「神의 손」으로 불리는「球聖」들이 전세기를 동원해 대륙을 오가며 자선경기를 펼친다.그래서 곧잘「꿈의 잔치」로 통하는 세계 당구대회에서 우리나라 출신으로 우뚝 선 세계적인 대스타가 있다.바로 지난 9일 벨기에 겐트에서 열린 93월드컵 당구선수권대회 최종결승에서 코드롱 프레드릭(벨기에)을 꺾고 시리즈 마지막 우승과 함께 93 세계 챔피언에 오른 李相千씨(39.미국뉴욕 거주).
그는 벨기에대회후 곧이어 열린 네덜란드 로테르담 초청대회를 거쳐 18일 뉴욕으로 귀향했다면서 본사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자신의 당구 인생이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이 몹시 기쁘다고 했다. 『가장 무서운 적수였던 4년 연속 세계 챔피언 토비용 브롬달(31.스웨덴)이 1회전에서 탈락하면서 승리의 여신이 찾아왔음을 느꼈다』는 그는『물심양면으로 성원해준 한국 국민들과 당구인,그리고 불평 한마디 없이 지원해준 아내(權경순.3 5)에게감사한다』고 전해왔다.
한국 당구사상 최초로 세계챔피언이 된 그가 당구 유학차 큐 하나만 들고 미국에 건너간 것은 지금부터 7년전인 87년10월.당시 무일푼 불법 체류자였던 그는 집념의 노력으로 3년만인 90년 세계당구월드컵(BWA)랭킹 7위에 뛰어올랐 다.
또 90년10월 미국당구협회장의 와일드 카드(추천)로 출전한벨기에 스파국제대회에선 세계 공식대회 두번째로 한 큐에 15점을 치는「피프틴 앤드 아웃」을 기록,세계 당구계를 깜짝 놀라게하기도 했다.당구 종주국 벨기에의 영웅 레이몽 크루망이 60년초반 퍼펙트를 기록한지 무려 30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후 李씨는 91년 독일 베를린 그랑프리 국제대회 첫 우승을비롯해 월드시리즈 랭킹 4위,92년 3위,93년 2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이 되기 위한 수순을 차곡차곡 밟았다.미국 당구계에서의 위상도 점점 높아졌다.전미선섰권대회를 20번 이상 제패하면서「인간 로봇」이란 애칭을 얻기도 했다.
세계 스리쿠션 무대에「상리」란 이름으로 통하는 李씨의 최대 강점은 뛰어난 연타능력.컴퓨터 당구로 정확도가 빼어나며 다음 공의 위치까지 치밀히 계산,한 큐에 7~8개씩 거뜬히 쳐내기 예사였다.하도 몰아치기가 뛰어나 국내에 있을 땐「 칙칙폭폭」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서울 원효로가 고향인 그는 경기중.고등학교(71년.67회)를졸업할 무렵까지 중3때의 가출을 제외하고는 여느 중고생과 다르지 않았다.서울대 입학(72학번.공대 응용수학과)때만 해도 당구선수가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당구 큐 를 처음 잡은게 71년 겨울.10분 당구값이 15원하던 시절 선배의 손에 이끌려 동네인 원효로 당구장에서 처음 당구용 막대기인「큐」를 만져봤다고 말했다.그는 3개월만에 3백점을 뛰어넘어「동네고수」란 소리를 들었다.천부적인 소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러나「큐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끼어든 것은 74년 20세때부터.서울대 재학중 휴학계를 내고 입대한지 며칠만에 치질로 귀향조치 당한 뒤였다.학교에 휴학계도 냈겠다,군대에서도 귀향조치됐겠다,할일이 없어지면서 당구장에 자주 드나들게 됐고 2개월만에 5백점을 돌파해버렸다.자연히 초보자 수준의 일반적인 사구경기에 흥미를 잃었고 스리쿠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李씨는 매일 오전10시부터 통금 직전까지 당구장에 살면서 스리쿠션을 쳤다.
마침내 동네를 벗어나 고수들이 꾀는 충무로3가 영화인의 거리에 진출했다.거기에서 만난 사람이 70년대 중반 국내 당구무대에서「금호동 꼬마」로 이름날리던 예술구의 달인 김철민씨였다.그는 李씨가 만난 최초의 강적이었다.그는 결국 李씨 를 프로 당구계에 데뷔시킨 은인이자 친구가 됐다.그후 한상화.전광운.박병문씨등 걸출한 당구 스타들과도 시합에서 만났다.그는 오직 실전과 게임을 통해 한 수,두 수씩 터득했고 남에게 질 때면 문제가 된 샷을 찾아 몇시간씩 혼자 연습했 다.
70년대 중반무렵 전국 고수들이 자주 모이는 당구장은 신촌 특실당구장이었다.이곳에서 수많은 당구의 달인들을 만났고 하루 24시간중 12시간 이상을 당구로 보냈다.학교는 휴학중이었지만복학할 뜻이 없어 그만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였 다.
76년 겨울부터 정상철씨 등과 팀을 이뤄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했고 거의 전승을 거두는 상황이 계속됐다.승부사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75년 3월 제8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에 첫 출전,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3위에 올랐다.이후 다섯차례 한국챔피언을 포함,국내대회에서 10여차례나 우승했다.
그러나 당구 챔피언은 사회적 대접은커녕 생계도 어려웠다.85년 아시아선수권대회겸 도쿄세계선수권대회 선발전 우승을 끝으로 국내대회엔 참가하지 않았다.그리고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결국 외국에서의 선수생활이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열어주었다.무일푼에 불법체류자였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신묘한 그의 재주는 곧 숨통을 터주었다.전직 고등학교 교장이며미국 당구계의 원로인 조 노블씨(66.뉴욕 거주 )를 만났고 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된 것.노블씨의 도움으로 89년 세계챔피언인 루도 딜리스(미국)등 세계 정상들과 시범경기도 갖게 됐고9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대회에 나서게 됐다.
「상리」는 마침내 미국에 정착한지 7년만에 세계 챔피언이 됐고 1년에 큐 하나로 50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부자가 됐다.자신의 이름을 딴 상리빌리어드클럽(001-1-718-397-9494)을 뉴욕에 두개씩이나 개설하고 있으며 미국.유 럽등 전세계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다.
부인과 두살짜리 딸을 둔 李씨는 1년에 2~3개월은 당구경기차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다.당구를 알리고 한국을 알리기 위해…. 〈裵有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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